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 10장 후기 왕정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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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 10장 후기 왕정시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지적한다. Iain Provan, V. Philips Long, Tremper Longman III, op. cit., 544.
4. 사마리아의 멸망부터 예루살렘 함락까지(p.553-566)
앗시리아는 사마리아를 함락시킨 후 이스라엘인들을 앗시리아 각지로 분산 이주시켰고, 또한 반대로 앗시리아의 다른 지역 포로들은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시켜 남은 사람들과 혼인을 하게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북방 이스라엘인들의 민족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대이스라엘 중 유다만이 독립국으로 명맥을 이어나갔다. 유다의 히스기야 왕은 북이스라엘의 멸망 몇해전(B.C727년 왕하18:9-12)에 유다의 왕이 되었다. 히스기야는 처음에 아버지 아하스와 함께 유다를 공동 통치하였다(왕하18:13). 이 기록에 따르면 히스기야는 714년에 왕으로 즉위한 셈인데 이는 18:9의 내용과 모순된다. 따라서 18:13의 통치 연수는 히스기야가 단독으로 통치하시 시작한 해를 기준으로 계수한 것이고 18:9은 공동 통치를 기준으로 계수한 것이다. 727-714년 사이의 유다 역사와 714년에서 701년 사이의 유다 역사에 대해 확실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어렵다. 유다에 관한 앗시리아 비문은 매우 적고 그 내용도 모호하다. 반면 성경 자료는 서술범위가 매우 제한 적이어서, 히스기야의 종교개혁과 산헤립의 유다 침공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왕하18:3-6; 대하29:3-31:21). 히스기야는 사르곤의 엄청난 군사력을 보고 막판에 반 앗시리아 반란 여납에서 빠졌을 것이다. 그는 앗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침으로써 앗시리아에 대한 충성 서약을 갱신했다. 구약성서는 705년 사르곤의 사망 이후 제국의 여러곳에서 발생한 광범위한 반란의 일부(왕하18:7)로 히스기야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새 왕 산헤립은 시리아-팔레스타인에 관심을 두기 앞서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바벨론 왕권을 되찾기 위해 열심히였다(703-702년). 산헤립은 결국 701년에 시리아-팔레스타인으로 진군하여 그곳에서 앗시리아의 주권을 확립하렸다. 성서는 히스기야가 산헤립의 공격에 잘 대비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모든 활동들은 히스기야의 반란을 의미하며, 산헤립은 라기스로부터 군대를 예루살렘에 보내어 히스기야가 완전히 항복하도록 설득한다. 구약성서 왕하18:13-19:37, 대하32:1-22, 사36:31-37:38에 나타난 산헤립에 대한 기록은 히스기야가 앗시리아의 주권에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셀렘이 결국 앗시리아 군대에 포위되었음을 한결 같이 증언한다. 또한 열왕기, 이사야 그리고 앗시리아 기록은 이 전쟁의 시점에 이집트 군대가 개입하였다고 증언한다. 앗시리아 본문은 이집트 군대의 출현과 그 군대와의 전투를 묘사한 후 예루살렘 포위 공격을 이야기 한다. 열왕기 기자와 이사야는 예루살렘에 대한 앗시리아의 포위 공격이 시작된 후 이집트 군대가 개입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후 산레입의 원정은 히스기야를 고입시켰으며, 많은 영토가 아스돗, 에그론, 가사에 의해 병합되었으며, 많은 군인들이 이스기야를 버렸다.
이스기야의 아들, 므낫세에 대한 증거는 성경이 전부이다. 그의 이름은 에살핫돈(680-669
)과 앗수르바니팔(668-630)의 통치때 작성된 자료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자료들은 므낫세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므낫세는 통치기간 대부분을 앗시리아의 충실한 종으로 지냇다. 앗수르 문서에서도 이런 므낫세의 모습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하33:14-16에 묘사된 므낫세의 건축 사업과 종교개혁은 므낫세가 앗시리아를 주군으로 섬기면서 어느정도 자유를 누렸음을 암시한다.
므낫세를 계승해 유다의 왕이 된 것은 아몬이다. 그는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당한다. 그에대해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아몬을 이어 요시아가 유다의 왕이되었는데 성서는 아몬과 달리 요시아에 상당한 관심을 갖는다. 열왕기와 역대기기자는 요시아를 여호와 종교의 순수 형태-오경에 포함된 모세 율법에 근거한 여호와 종교를 추구했던 사람으로 묘사한다. 역대기기다는 그가 성전에서 율법서를 발견하기 이전부터 개혁 조치를 단행하기 시작했다고 묘사하는 반면, 열왕기는 율법서 발견 이후 개혁이 이루어진 것으로 말한다. 요시아의 종교 개혁을 수도 북쪽까지 확장할 수 있었던 기회가 통치 12년 이후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앗수르바니팔이 630년에 죽자 앗시리아 제국은 장기간의 내전과 혼돈에 들어갔다. 그 과정 속에서 바벨론이 새로운 제국의 권좌로 부상했다. 요시아는 자신이 바벨론의 편이라는 인상이 유다에 이익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요시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요시아는 살해되었고 유다가 앗시리아의 쇠퇴로 말미암아 누렸던 제한된 독립마저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새 왕 여호아하스(렘22:11;대상3:15)는 즉시 리블라에 있던 느고의 군사 본부로 소환되어 왕위에서 제거되었다. 느고는 여호아하스의 형제, 엘리아김을 왕위에 앉히고, 그르이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엄청난 조공을 요구하였다.(왕하23:31-35;대하36:1-4) 이후 605년 남쪽 하맛에서 바벨론이 이집트 군에 대해 거둔 대승과 함께 변하기 시작하는데, 바벨론의 새로운 왕인 느부갓네살은 604년 자신이 왕이되던 해에 시리아-팔레스타인으로 원정한다. 그리고 블레셋도시 아스글론을 함락한다. 이때 여호야김은 이집트로부터 바벨론으로 충성을 바꾸었다. 하지만 바뀐 충성을 오래가지 못하였고 바벨론에 반란함으로 598년 바벨론의 주력 부대가 예루살렘 성문 앞까지 오게된다. 이때 유다를 도와줄 이집트 군대는 오지 않았다(왕하24:7). 예루살렘은 597년, 3월15일 혹 16일에 바벨론에게 항복하였고 새 왕 여호야긴은 다른 국가 지도자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간다. 결국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 멸망하게 되었다.
-참 고-
<참고.1>카르낙 신전 벽화-시삭에 대한 기록들 <참고.2>카르낙 신전 벽화-시삭이 점령한 도시들
<참고.3>자쿠르(Zakkur)석비-벤하닷3세와의 전쟁기록 <참고.4>살만에셀3세 블랙오벨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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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07.16
  • 저작시기20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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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058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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