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실학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려고 했는가 -다산 정약용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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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 실학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려고 했는가 -다산 정약용을 중심으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실학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려고 했는가?
1. 시대적 배경
1) 실학 등장이전
2) 실학의 등장
2. 정약용의 실학사상
1) 정약용의 생애
2) 정약용의 철학
(1)성리학의 비판
(2) 수기치인(修己治人)
(3) 민본사상(民本思想)
3) 정약용의 교육관
(1) 교육의 기회균등
(2) 교육의 전제조건
(3) 교육의 순서
(4) 교육의 내용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승부를 내는 폐단을 빚어 왔다고 다산은 비판하였다.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삼국사기, 고려사, 동국통감, 국조보감(國朝寶鑑), 동사집성(東史輯成) 등을 과거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 책과 우리의 역사의 사실과 각 지방의 풍속을 시에 인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한번 과거에 빠지면 예악(禮樂)은 곧 가외물건이 되고 형정(刑政)은 잡사(雜事)가 되어, 수령 등 관직을 받으면 사무에 어두워 아전의 말에 따르게 됨으로 이러한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고금의 전례를 명석하게 이해하고 국사를 이해하는 사람이 과거에 나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훌륭한 시를 쓰기 위해서, 시속에 역사적인 사건을 인용해야 한다는 그의 시론이 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 때문에 다산은 사서를 고과해서 三史(사기(史記), 남사(南史), 요금사(遼金史))와 國史에서 1점도 받지 못한 사람은 대과에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④ 기예(技藝)
실학자들의 기본적인 관심은 학문과 현실세계의 일치였다. 그 중에서도 다산은 기예 교육을 강조하여 농업·방직·군사·의술 등에 관하여 가르칠 것을 주장하며, 무엇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기예라고 규정한 다산은 국가를 경륜하는 자가 마땅히 강구할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산은 성인이라도 천만인의 지혜와 궁리를 당할 수 없고, 많은 사람이 모이면 해당분야의 기예는 더욱 정교해지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더욱 교묘해지는 것이 기예라고 보아 이를 농업, 방직, 군사, 의술 등의 방면에서 이론적으로 탐구함과 동시에 실제로 화성축성계획에 적용하였다. 다산이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면의 기예를 논의한 것은 당대의 사회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는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움직이었다.
농사짓는 기술이 정교하면 수확을 많이 거둘 수 있으며 힘을 덜 들이고 좋은 곡식을 얻을 수 있으니 좋고, 베짜는 기술이 정교하면 물자를 적게 들이고 좋은 옷감을 얻을 수 있으며, 표백과 채색의 기술의 개선으로 훌륭하게 될 수 있다고 보며, 병정도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공격·방어 또는 군량을 운반하고 성벽을 쌓는 일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의원 또한 약의 성질을 잘 알면 맥을 통해 증세를 진단하여 환자를 잘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장도 기술의 습득을 통하여 기구를 제조하고 수레·배·가마 등을 잘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다.
기예의 발전은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국가를 부강케 하여 이는 곧 부국강병과 연결될 것이다. 따라서 다산은 새로운 서적을 읽고 기예를 널리 가르쳐 연마케 할 것이며 이를 위해 외국으로 유학을 해서라도 앞선 기예를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지배적인 풍조는 이러한 기예를 천시하거나 도외시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낡고 고루한 관념을 타파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Ⅲ. 결론
비록 조선 후기이긴 하였지만 민본사상을 주장하였다는 점은 그의 특출한 면으로 느껴진다. 백성의 일상적 생산활동을 통해 과학기술이 진보, 발전된다는 인식을 확립했던 것은 당시의 시대에서는 놀라운 생각이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의 객관적 이해를 위해 노력했고 그것이 도덕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비로소 그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백성에 있음을 인식하고 백성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백성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근거 또한 사회가 직면해 있는 봉건적 질서를 극복하고자 함이다. 그는 실학사상의 집대성자이고 사회와 백성을 위한 사고를 가진 개혁사상가이다.
그는 당시 사회가 직면해 있던 각종 해체 현상을 직시하고, 사회개혁을 위한 여러 방향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가지고 그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그는 문제점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 원인에 대해 규명하고자 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개혁안을 마련해 보기 위해 노력하였다.
교육에서 그의 근본이념을 엿볼 수 있다. 백성을 위한 실질적인 교육이 기본이다. 교육의 기회균등을 주장하였고, 과거의 폐단을 수습하여 올바른 인재가 채용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무조건 적인 교육만을 주장하진 않았다. 소위 ‘먹고 살아야’ 교육을 필요로 한다는 현실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어려운 나라의 현실을 즉시하고 정치·경제의 올바른 방향을 먼저 제시하는 탁월함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개혁안을 자신이 직접 추진할 수 없었고, 관직에 대한 경험 부족은 그의 개혁안에 현장성의 결여라는 문제점이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즉, 개혁의 목표와 개혁된 사회상에 대해서는 뚜렷이 제시하고 있지만, 개혁된 사회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 방법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여기서 그의 개혁안이 가지고 있는 이상적 특성과 함께 실천에 있어서의 제한성이 드러나게 된다. 그의 개혁안은 민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민본주의에서는 백성을 객체화하여 통치나 보호의 대상으로만 파악할 뿐, 백성 자신을 통치의 주체로 인식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제약성은 그 개혁안의 실현가능성에 의문점을 남긴다.
하지만 정약용은 18세기를 전후하여 우리나라 사회에서 강력히 제시되고 있던 개혁의 의지를 집대성했고, 개혁의 당위성을 명백히 해주었던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에게는 개혁을 향한 열정과 함께,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던 민에 대한 애정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는 과감하고 현실적인 시대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으며, 파악한 문제의 해결하기 위해 고뇌하던 양심적인 지식인이자 교육자였다.
유배 중에도 사회문제와 해결에 대한 고뇌의 끈을 놓지 않고 연구한 결과 많은 우수한 사상들이 지금 우리에게 많은 의의를 주며 남아 있다. 실질적인 학문을 통해 내리막길로 향하던 나라를 되살리고자 했던 실학의 그 정신을 이어받아 나의 본보기이자 받침으로 삼아 현장에서의 훌륭한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을 때의 보탬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남궁용권 외 2007 교육의 역사와 사상 형설
목영해 외 2006 교육의 역사와 철학 교육과학사
박의수 회 1995 교육의 역사와 철학 동문사
장승구 외 2001 정약용과 실학의 철학 서광사
한상남 외 2005 정약용 지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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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08.12
  • 저작시기20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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