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교[道敎] 유교[儒敎] 불교[佛敎,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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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도교

2. 유교 [ 儒敎 ]

3. 불교 [ 佛敎, Buddhism ]

본문내용

)과 같은 대학승(大學僧)은 세속5계(世俗五戒)로 국민도의를 확립하였고, 자장(慈藏)은 문물제도를 수립하였으며, 의상(義湘)은 실천적인 수행(修行)과 사찰의 건립을 통하여 화엄의 교리를 널리 펴는 한편 많은 학승을 양성하였고, 원효(元曉)는 80여 부의 논소(論疏)를 지어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는 한편 통일불교 창조에 정력을 쏟았다.
의상과 원효는 그 학통이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원측(圓測)은 유식설(唯識說)에 통달하여 독특한 견해를 가졌고, 그 때문에 중국의 법상종 정통파에게는 비난을 받았으나 그의 저술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는 티베트어로 번역되어 전한다. 혜초(慧超)는 인도에 건너가 불적(佛蹟)을 순례하고 육로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귀국한 다음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하여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그 밖에 신라시대의 고승들로는 도증(道證)·경흥(憬興)·지통(智通)·표훈(表訓)·명랑(明朗)·승전(勝詮)·대현(大賢)·도의(道義)·신행(信行)·체징(體澄)·지증(智證)·혜소(慧昭)·현욱(玄昱)·개청(開淸)·낭공(朗空)·범일(梵日)·무염(無染)·원랑(圓郞)·진경(眞鏡)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당나라와 일본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2) 고려시대
고려의 불교는 신라불교를 그대로 계승하는 한편 송(宋)나라의 영향 아래 독자적인 발달을 이루었다. 태조 왕건(王建)은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새로 승과(僧科)를 제정하여 승려를 우대하였다.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을 연중행사로 개최하는 등 태조의 숭불정책은 고려 전반에 걸쳐 계승되면서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당시에 건립된 사찰로는 개성의 왕륜사(王輪寺)·법왕사(法王寺)를 비롯한 16사(寺)와 봉은사(奉恩寺)·진관사(津寬寺)·부석사(浮石寺)·관음사(觀音寺)·숭교사(崇敎寺)·석왕사(釋王寺)·영명사(永明寺) 등이 있으며, 공예품으로는 관촉사(灌燭寺) 석등, 부석사 조사전벽화(祖師殿壁畵), 대흥사(大興寺)의 종 등 우수한 예술품을 낳았다.
특히 문종(文宗) 연대에는 고려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간행하여 한국불교문화의 대표작을 남겼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음에도 이름난 고승은 많이 배출되지 못하였다. 그 중에서 체관(諦觀)은 천태종을 재흥시켰고,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아들로 일찍이 11세 때 승려가 되어 송나라에 유학한 후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 속장경(續藏經) 4,740여 권을 간행한 것은 특기할 만하며, 또 문하생이 1,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 밖에 중기에 이르러 지눌(知訥)·수기(守其)·균여(均如), 말기의 나옹(懶翁)·보우(普愚)·보조(普照)·백운(白雲) 등은 이름을 떨친 고승들이었다. 고려의 불교종파는 신라의 종파가 계승되었다가 말기에 다소 분화되어 조계종(曹溪宗)·천태법사종(天台法師宗)·천태소자종(天台疏子宗)·화엄종·총남종(摠南宗)·자은종(慈恩宗)·신인종(神印宗)·남산종(南山宗)·도문종(道門宗)·중신종(中神宗)·시흥종(始興宗)의 11종이 성립되었으며 그 중 화엄·자은·총남·중신·시흥의 5종을 5교(敎), 조계·천태의 2종을 양종(兩宗)이라 하여 5교 양종의 종파를 이루었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이르러 조정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인하여 불교는 미증유의 수난기(受難期)를 맞이하였으니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는 한편, 함부로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고 사전(寺田)에도 과세를 하였으며 승려의 궁중출입과 도성(都城) 내 출입을 금하였다. 또한 연산군 때는 승과(僧科)를 폐지하고, 삼각산의 여러 절의 승려를 몰아내어 그곳을 놀이터로 삼았으며 원각사(圓覺寺)의 불상을 옮기고 그곳을 기관(妓館)으로 삼는가 하면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덕(興德) ·흥천(興天) 두 절을 없애고 여승은 궁중의 노비(奴婢)로 삼고 승려들도 모두 환속(還俗)시켰다. 중종(中宗)은 경주(慶州)의 동불상(銅佛像)을 녹여 병기(兵器)를 만들고 원각사를 헐어 그 재목은 민가를 짓는 데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에도 불구하고 불교신앙 자체를 말살하지는 못하였으며, 특히 상류층 부인의 신앙을 저지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역대왕 중에는 호법왕(護法王)도 있었으니, 태조는 석왕사 ·태고사 ·해인사 등에 비판(婢板)을 하사하였고, 세종 ·세조 때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 불경을 간행하였다. 특히 세종은 불교종파의 정비를 단행하여 조계 ·천태 ·총남의 3종을 선종(禪宗)으로, 화엄 ·자은 ·시흥 ·중신의 4종을 교종(敎宗)으로 통합하여 선 ·교 양종을 성립시켰다. 이름 높은 명승도 많이 배출되어 무학(無學) ·함허(涵虛) ·보우(普雨) 등과 임진왜란 때의 승장 서산(西山) ·사명(四溟) ·처영(處英) ·영규(靈圭) 등은 특히 유명하다. 그 후 한국불교는 일제강점기에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31개 본사와 1,200개의 말사(末寺)로 구분되었고, 3 ·1운동 때는 많은 승려가 가담하였으며, 한용운(韓龍雲) ·백용성(白龍成) 등은 33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8 ·15광복 후 전국불교대회를 열어 교구제(敎區制)를 정하고 중앙에는 총무원, 각 도에는 교무원을 설치, 종헌(宗憲)에 따라 조직을 강화하였다.
6 ·25전쟁 후에는 파괴된 100여 개의 사찰을 수축하는 한편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전개하였고, 고아원의 설립, 동국대학 ·해인대학 ·경기대학과 해동(海東) ·용인(龍仁) 등 10여 고등학교 및 20여 개의 중학교를 운영, 문화사업에도 기여하고 있다. 1954년 이래 비구(比丘) ·대처(帶妻) 두 파의 분쟁으로 분열된 후 여러 개의 종단으로 갈라졌다. 현재 교육부에 등록된 종파는 조계종을 비롯하여 태고종(太古宗) ·법화종(法華宗) ·미륵종(彌勒宗) ·법상종 ·보문종(普門宗) ·일승종(一乘宗) ·용화종(龍華宗) ·불입종(佛入宗) ·원효종(元曉宗) ·천태종 ·화엄종 ·정토종(淨土宗) ·진각종(眞覺宗) ·총화종(總和宗) ·진언종(眞言宗) ·천화불교(天華佛敎) ·한국불교법화종 등 18개 종파가 있다. 사찰수는 5,700여 개소이며, 승려가 2만여 명, 신도수 1,300만여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불교신문》을 비롯하여 각 종파 ·단체들에서 정기간행물도 30여 종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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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1.12.12
  • 저작시기2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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