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에 있어 지·관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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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전통적인 이해
2. 지·관의 내용에 대한 경전적 근거
3. 지는 곧 사선
4. 관은 곧 사념처(또는 사념주)
5. 지·관의 차제에 대한 교리적 근거

Ⅲ. 결론

본문내용

takka ⑥sa ⑤vedan 와 같은 還滅緣起의 구조는 止와 觀이 次第關係가 될 수 밖에 없는 교리적 근거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순서는 왜 想受滅(定)에 있어 五蘊이나 12연기 등의 순서대로 受想滅定이 아니라 sa -vedayita-nirodha-sam patti로 쓰이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기도 한다. 이것은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수행이론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논리적으로 그리고 치밀하게 구성되어 전개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한 예로 볼 수 있다.
Ⅲ. 결론
止·觀의 관계는 그 구체적인 내용인 正定인 四禪과 正念인 四念處를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四禪의 목적이 일상적인 사유작용을 끊음으로써 念을 발현하고 완성한다는 점으로 볼 때, 그것은 四禪 자체로서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 단계의 예비적 수행임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四禪을 통해 念을 발현하고 완성하지 못한다면, 다음의 四念處와 같은 觀 수행은 시작할 수 없다. 止의 四禪은 觀의 四念處를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부의 수행이다. 그리하여 四禪의 念이 기본적으로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은 四念處라는 수행의 Vipassan 이다. 四念處의 내용은 五蘊을 觀하여 無常한 진리를 체득하는 如實知見이며, 如實知見은 곧 해탈·열반으로 가는 지혜이다. 따라서 이러한 止·觀의 관계를 다시 요약하면 '禪修行(四禪)이라는 형식을 통한 삼매의 성취(念의 완성)속에 身·受·心·法 또는 五蘊의 Vipassan 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止 ·觀의 관계는 매우 분명해졌다. 이는 전통적인의 주장처럼 결코 止와 觀이 평등한 위치에 있어, 처음부터 동시에 닦을 수 있는 수행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시에 닦을 수 있다는 주장은 Vipassan 를 위한 형식으로서 선수행과 그 선수행의 내용인 삼매의 개념에 대한 혼돈에서 야기한 것이라 보여진다. 하지만 초기불교의 교리와 수행체계의 전반적인 맥락을 통해 볼 때 양자가 평등한 관계로서 처음부터 같이 닦아 서로 보완하는 관계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止觀合修나 止觀雙修 (또는 定慧雙修)와 같은 말은 재고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止와 觀의 관계는 次第의 관계로서 止가 배제된 觀이 있을 수 없다는 점과 마찬가지로 觀이 배제된 止 다시 말해, 觀을 목표로 하지 않은 止 수행은 근본적으로는 불교가 목적하는 바에 있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止 수행은 반드시 觀으로 연결되어야 만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觀만이 불교의 궁극적인 입장에서 볼 때 큰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如實知見은 止의 내용이나 결과가 아니라, 止가 바탕이 된 觀 수행의 내용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四禪 속에 止·觀을 모두 보려고 했던 전통적인 입장도 四禪의 내용과 四念處와의 맥락상 전혀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상과 같은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난 止·觀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그 동안 갖가지 오해를 불러왔다(특히 간화선측으로부터). 예를 들면, "망심에 불과한 것," "소승불교의 수행법," "오관을 열고 분별하는 수행법," "간단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니 효력은 있지만 근원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부셔져버리고 또 부셔져 버리기 때문에 항상 같은 노력을 해야하는", "보통사람의 수행법", "하근기의 수행법", "바람직한 수행법이 아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수행 같지만 믿을 수 없는 공부", 그리고 "관하는 것과 관하는 대상을 분리한다는 점 때문에 유효하지 않는 수행법"등이 그것이다.
) 이 같은 인용들은 모두 권위있는 화두선 수행자와 이론가에 의해 인쇄물을 통해서나 학회의 발표를 통해 언급되어졌다. 다음 논문에서 Vipassan 의 교리적 토대와 성격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인용과 적극적인 역비판을 시도할 작정이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모든 Vipassan 수행에 대한 비판의 근거는 타당하지 않으며, 반대로 근본적인 입장에 서서 역비판의 근거가 될 뿐이라는 점이다. 진정한 의미의 Vipassan 는 결코 일상적인 의미의 보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본 논문의 내용이 시사하는 몇 가지 점을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정수행[止]에 따른 念의 완성 또는 확립이 없는 Vipassan 는 Vipassan 가 아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Vipassan 을 수행한다고 또는 지도한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Vipassan 의 참된 의미를 흐리게 하고 오해하도록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불교의 모든 수행체계가 모두 止·觀이라는 용어 속에 總攝될 때, 불교수행의 근본적인 의미가 회복된다는 점이다. 결코 禪이나 定 또는 禪定이 불교 수행의 모두를 담거나 대표하는 용어로 보아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불교 수행의 목표가 "생각 끊기"나 "의식의 작용을 끊는 것"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셋째, 근본적인 입장의 止·觀 수행과 명상이나 요가 또는 갖가지 觀想法과 차별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특히 作意적인 성격의 관상법이 止·觀의 범위에 해이하게 적용된 경우를 바로 잡아야 한다. 예를 들면, 大乘의 唯識派의 止·觀 설명에 있어 影像(pratibimba)의 觀이, 淨土의 觀想念佛이 그리고 密敎의 五相成身觀등이 이 범주에 들어가지 않나 하는 점이다.
넷째, 철학이 논리적 사유나 추론 또는 경험적인 사실을 하는 이론 체계라면, 불교는 철학이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불교의 如實知見은 그로부터 떠난 자리로부터 그 출발점을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자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려는 데에 좀 더 조심스러워야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화두선의 근거와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오히려 초기불교의 지관 내용과 관련 시켜서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無念無想 그리고 無心을 강조하면서, 한 마음도 일으키지 않고 화두을 觀 또는 看하는 것이라 할 때, 화두선의 근거는 Vipassan 로부터 정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Vipassan 는 화두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는 물론 더 나아가서는 서로가 다르다는 전제아래 양자간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상대적으로 어느 것이 더 뛰어난 수행법임을 애써 증명하려는 태도는 성급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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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1.29
  • 저작시기2002.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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