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퇴계의 사칠론에 관한 새로운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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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즉 그것은 행위를 지향하지 않는 情과 행위를 지향하는 情인 것이다. 앞에 나오는 네 가지 情-喜·怒·哀·懼-는 첫번째 집단에 속하고, 반면 뒤에 나오는 세 가지 情-愛·惡·欲-은 두 번째 집단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한편으로 怒와 懼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愛와 惡에서 情인지 欲인지의 애매함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怒와 懼는 欲이 될 수도 있으며 愛와 惡는 경험상으로는 情으로 느껴질 수 있다. 어느 경우에도 육체와 육체적 氣가 理에 따라 관련됨을 부인할 수 없다.
(3) 퇴계는 志와 體가 호발적 관계에 있다는 생각에서 理氣가 상호 發한다는 주장을 한다. 맹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참으로 통찰력 있는 주장이다. 비록 퇴계가 주희의 충실한 계승자로서 理를 (스스로 발한다는 의미에서 보면) 비활동적이고 무조작적인 것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는 마음의 氣가 理를 위하여 그리고 理에 의해서 理에 작용하는 것이므로 실제로는 理가 氣를 발한다고 해도 좋은 그러한 의미에서 마음 속의 理가 氣와 合한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또 心의 氣는 특별한 방식으로 작용하고 心이 특별하게 작용하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특별한 氣와 合한 특별한 理가 있다는 사실에 있음도 동시에 사실이다. 맹자는 理氣를 구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 있어 理氣는, 만약 義理와 心 사이에 구분이 가능하다면,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어서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 理氣가 나누어질 수 없다고 하는 주희의 견해와는 달리, 양자는 섞일 수도 혼합될 수도 없는 것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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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미에서, 心의 理는 身의 氣와 인간 전체에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身의 氣와 인간 전체는 마음의 氣 혹은 理氣에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어느 경우에도 중심은 존재하고 다른 반응은 다른 중심이 있음을 의미한다. "사단"은 단지 心性에 있어서 理氣의 중심을 나타내고, "칠정"은 육체에 있어서 理氣의 중심을 나타낸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상호작용이 일관되고 일치된 감정이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심신 간에 충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두 가지 원리로 이루어진 이중구조가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통일체로서의 한 인간존재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건은 통일과 조화에 대한 요청이어야 하며, 그것은 마음의 더욱 깊은 본성에서 확인되고 논증되는 한 인간의 조직원리(理)라고 할 수 있다.
(4) "理가 발하면 氣가 따르고, 氣가 발하면 理가 탄다."고 하는 퇴계의 유명한 주장은 서로 중심을 달리하는 발용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친절하고 정확하게 일반화된 발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완전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맹자의 관점에서 보아야만 증명되고 완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志와 體는 서로 각자의 방향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따라서 理와 氣도 理가 발하거나 혹은 氣가 발하는 호발적 관계에서 서로 발하고 따르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理가 발하는 과정에서는 왜 氣가 따를 수 없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경험상으로 보아도, 때에 따라서 조화로운 氣가 理를 쫓아서 理를 발하게 할 수도 있고, 또 때에 따라서 조화로운 理가 氣를 발하게 하지 못하거나 별로 조화롭지 못한 氣가 오히려 理를 쫓아서 그것을 떠받치는 경우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또 다른 경우에는 전혀 조화롭지 않는 氣가 理를 장악해서 그 위에 타고는 그 理를 파괴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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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특히 이러한 상황을 알고 관심을 가졌다. 그는 "存心養性"을 말한다. 그는 또한 "浩然之氣를 기름"과 밤에 "夜氣"를 회복함과 氣를 "道義에 맞게 함"을 말한다. 그는 더 나아가서 "망각과 조장" 그리고 "자포와 자기"를 경계한다.
이상과 같이, 비록 형이상학적으로는 "사단"이 그것과 함께 하는 혹은 그것을 따르는 氣를 가질지 모르지만, 이러한 단서를 발양하고 확산시켜서 현실로 나타나게 하기 위한 氣의 안식처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는 한 인간을 가정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理에는 氣가 따르고 氣가 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氣가 발하는 경우에 왜 理가 항상 타게 되는지를 물어볼 수 있다. 만약 여기서의 理가 마음의 理 즉 도덕원리를 의미한다면, 그 理는 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육체의 표현으로서의 "칠정"은 언제나 육체의 수준에서 그 나름의 理를 갖는데, 그것은 전체 인간이 갖는 전체 理 속으로 통합되어야 하며 그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인간의 자기 수양에 의존한다. 통합과 조화적 측면은 물론 마음과 전체 인간을 형성하는 더욱 깊은 본성인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마음에 관한 맹자의 이론 모델에 대한 분석이 어떻게 퇴계의 사칠론과 그의 주장을 해명하고 보충하여 주는지에 관해 살펴 보았다. 사실 퇴계의 이론이 올바로 이해되고 평가되는 것은 맹자의 이론적 모형에서 고찰할 때라는 점이 드러난다. 반면, 理氣의 分開라고 하는 퇴계의 이론은 또한 분명히 주희로부터 나온 한 측면 내지 차원을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理氣로 설명되는 주희의 심성론에서 어떤 관점을 요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서 초래되는 어떤 어려움도 우리가 맹자에 관해 고찰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퇴계의 사칠론은 맹자의 통찰과 주희의 논리를 종합하려는 시도를 표현하는 것이며, 따라서 양자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그 장점은 이와 같이 조명함으로써 평가될 수 있고, 또 그 단점도 이와 같은 조명을 통해서 보완될 수 있다는 것이다.
) 心性과 理氣에 관한 주희의 철학과 퇴계의 사칠론에 있어서의 의미에 관한 충분한 논의는 필자의 다른 논문 "On Chu Hsi's Philosophy of Mind, with Reference to His Theory of Self-cultivation"에 개진되어 있다. 우리가 여기서 논의한 주제와 관련해서는, 특히 이 논문의 1장(구조에 관한 부분)과 2장(작용에 관한 부분)을 참조할 것.
-370-
(김 종 석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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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8페이지
  • 등록일2002.04.26
  • 저작시기2002.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3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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