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 아시아 영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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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며

Ⅱ. 중심글

一. 태국(泰國, Thailand) 영화

1. 1950년대 이후부터 오늘날까지의 영화사
2. 독립 영화
3. 오늘날 아시아 영화를 새롭게 이끌어 갈, 주목할 만한
세명의 감독

二. 이란 (Iran) 영화

1. 이란영화의 어제와 오늘

2.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어린이영화, 그리고 다큐멘터리

三. 베트남(Vietnam) 영화

1. 주요 정치적 상황과 그 시대의 영화사적 사건

2. 중요한 영화적 미학
3. 주요 감독

四. 필리핀(Philippine) 영화

1. 시대별로 본 필리핀 영화

2. 대표감독

(3) 단편/실험 영화의 감독들

본문내용

데, 바로 리노 브로카(Lino Brocka)와 이슈마엘 베르날(Ishmael berna)이다. 1970년 <수배: 완전한 어머니 Wanted: Perfect Mother>로 데뷔한 브로카는 1974년에 자신이 만들고픈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자신의 영화사를 설립한 뒤 민감한 사회문제를 담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1974년에 만든 <셋, 둘, 하나 Tatlo, Dalawa, Isa>는 마약중독, 식민정책의 잔재, 여자 가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1975년에 발표한 <네온불빛 속의 마닐라 Manila: Sa Kuko ng Liwanag >는 슬럼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작품은 필리핀 영화게에서 신선한 자극이 되어 사회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영화들이 계속 이어졌다. 베르날 역시 <종말의 도래 pagdating Sa Dulo>, <물 속의 점 Nunal Sa Tubig> 등을 통해 여성의 독립 호모섹스에 대한 문제들을 파헤쳤다.
(4) 80년대
1980년대에 접어든 뒤 중반까지는 마르코스의 억압정치 하에서도 대학의 영화강좌나 실험영화 콘테스트 등을 통해 많은 독립 영화작가들이 배출되었으며, 간간이 브로카의 <보나>, 베르날의 <밤의 마닐라>, 마이크 드 레온의 <윙크>, 피크 갈라가의 <금, 은 죽음>등의 수작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마닐라 영화제를 개최하거나 필리핀 실험 영화 기금(ECP)등을 만드는 등 외형적으로 비교적 풍부한 지원을 하였던 마르코스 정권도 영화의 주제나 내용에 있어서는 상당한 간섭을 하였다. 이러한 억압과 규제는 1986년에 일어난 혁명으로 일시에 해소된 듯 하였으나 곧 경제적으로 어려운 제작 여건에 부딪쳐야 했다. 제작 여건의 어려움은 전반적으로 필리핀 영화계에 침체를 가져왔고 1991년 브로카가 사망한 이후 필리핀 영화는 이제 베르날과 단편/실험 영화 작가들이 대표하고 있다.
2. 대표감독
상업 영화와 체제 순응적인 영화가 판을 치는 가운데서도 필리핀 영화의 양심을 지켜온 것은 리노 브로카, 이슈마엘 베르날, 피크 갈라가로 대표되는 뉴 웨이브 영화와 1980년대 이후의 독립 영화, 단편영화였다.
(1) 리노 브로카
그는 필리핀 영화에 대한 해외 인식을 제고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1939년 4우러 3일 산 호세 출생인 그는 필리핀 대학에서 영문학과 연극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에는 한때 몰몬교회에서 수도를 하기도 하였다. 연극과 TV연출 생활을 하기도 했던 그는 1970년 <수배: 완전한 어머니>로 데뷔하였는데, 일찍부터 필리핀 사회가 지니고 있는 숱한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히트작을 내지 못하면 사장될 수밖에 없는 필리핀 영화 산업의 속성에 어느 정도 자신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74년 대중의 관심을 지속시키면서도 예술적 품위를 지키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영화사 시네 마닐라(Cine Manila)를 설립한 그는 이후 필리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주요 작품들을 계속 발표하였다. 그중 <네온불빛 속의 마닐라>는 필리핀 영화 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며 <인시앙 Insiang>은 깐느 영화제의 감독주간에 소개 된 후 유럽 전역의 극장과 TV에도 소개되었다. 그는 비교적 많은 작품을 양산해 내는 것으로 유명한데, 빈곤과 억압에 시달리는 필리핀 국민들에 대해 끊임없는 애정을 보내면서도 한정된 계층만이 볼 수 잇는 영화보다는 보다 많은 서민이 볼 수 있는 쉬운 영화들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과거의 상업 영화가 보여주었던 관습도 거리낌없이 인용하였으며 그런 가운데서도 비판 정신은 꼿꼿이 지켜 나갔다.
(2) 이슈마엘 베르날
브로카의 라이벌이자 브로카가 죽고 없는 지금 필리핀 영화의 양심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 일켤어지는 이슈마엘 베르날은 1938년 9월 30일 생으로 필리핀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프랑스의 엑상 프로방스로 유학을 가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였다. 그후 그는 다시 인도로 가서 푸나 영화학교에 입학하여 영화제작 과정을 공부하였다. 1971년에 귀국한 그는 <종말의 도래>로 데뷔하였는데 그의 작품은 주로 근대화되지 못한 오지의 삶의 묘사를 통한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탐구와 도시 생활 속에서의 여성의 독립과 호모 섹스 문제 등에 탐구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물속의 점>, <밤의 마닐라>, <기적>,<하늘의 선택>등을 꼽을 수 있다.
(3) 단편/실험 영화의 감독들
1980년대 필리핀 영화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이고 풍요롭게 만든 역할은 상업 극영화 부분에서 일어난 뉴웨이브보다 단편/실험 영화의 그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오늘날 단편 실험 영화가 이처럼 활성화 된 것은 교육기관과 제작 지원 단체의 효율적인 지원 덕분이었다.
1953년에 이미 국립 미디어 제작 센터가 설립되어 단편 영화 제작과 교육을 담당했고, 각 대학의 영화 관련학과와 필리핀 실험 영화 기금, 모웰펀드 영화 연구소(MFL,Mowelfund Film Institute) 등이 단편 실험 영화 발달에 큰 기여를 했다. 특히 모웰펀드 영화 연구소는 1979년에 결성된 영화 노동자 복지 기금의 산하기관으로 실험 영화 지망생들에게 워크섀을 실시하여 새로운 영화 형식의 창출을 유도하는가 하면, 모웰펀드의 후원 아래 만들어진 실험영화의 해외 소개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곳을 통해 배출된 단편 실험 영화 작가들로는 키드랏 타히미크(Kidlat Tahimik), 닉 데오캄포(Nick Deocampo), 레이몬드 레드(Raymond Red) 등이 있다. 그들 중 레이몬드 레드는 뉴 필리핀 영화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다.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형식으로 주목받았는데 17세에 <영생 Ang Magpakailanman>을 발표하여 필리필 영화계를 뒤흔들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파우스트 모티브를 이용하여 불사의 생명을 구하려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실험적인 영상과 대사처리, 독특한 사운드로 큰 주목을 받았으며, 뒤이은 <하품 Ang Hikab>에서는 악몽만 꾸는 남자와 행복한 꿈만 꾸는 남자의 대조적인 삶을 삶/죽음, 소리/침묵, 언어/영상, 움직임/정지, 꿈/현실 등의 대비로 그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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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1.01
  • 저작시기2002.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9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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