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악마들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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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실크로드의 악마들을 읽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실크로드의 성쇠

4. 스벤 헤딘 - 개척자

5. 오렐 스타인 - 비범한 유물 탐사가

6. 엄청난 유물을 발견하게 된 스타인

8. 본격적인 경쟁의 시작

9. 폰 르콕이 동전을 굴리다

10. 투르키스탄에서 가장 뛰어난 벽화

11. 쓰레기 더미에 숨겨진 비밀

12. 돈황 - 숨겨진 고대의 서고

13. 펠리오 - 품위있게 적을 만드는 기술

★ 서평

본문내용

고문헌에 대한 해석과 감정 작업에 매달렸다. 그런 와중에 스타인은 수집품 중 대영박물관에 개최할 특별전시회에 내놓을 만한 것들을 선별하는 작업을 해야 했고, 탐험했던 것을 설명한 두 권짜리 저서 『중국 사막의 유적들』의 집필에 착수해야 했다.
세 차례 탐험 동안 스타인이 중국에 가져온 미술 유물도 많았지만, 그의 명성에 항상 따라다닌 것은 돈황의 비밀 서고였다.
13. 펠리오 - 품위있게 적을 만드는 기술
프랑스는 뒤늦게야 중앙아시아 유물 사냥의 경쟁에 뛰어들었다. 1906년 8월 펠리오가 중국령 투르키스탄에 도착했을 때, 영국, 스웨덴, 독일, 일본의 탐험대들은 최소한 한 차례 이상 다녀간 뒤였고, 베레소브스키 형제는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으며, 스타인은 3차 탐험을 기약하며 이미 돌아간 상태였다.
탁월한 동양학 학자이자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화원인 에밀 세나르의 주도로 설립된 막강한 위원회는, 가능한 한 빨리 세 명으로 편성된 탐험대를 중국령 투르키스탄에 급파하기로 결정했다. 탐험대를 이끌 인물은 스물일곱의 젊은 중국학 학자 폴 펠리오로 선정되었고, 나머지 두 대원은 펠리오의 오랜친구이며 군의관인 루이 바양 박사와 샤를 누에트로로 전자는 지도작성, 박물학 표본의 수집, 그 밖의 과학적인 작업을 담당했고, 후자는 사진작가로 참가했다.
출발 준비를 완료한 펠리오 탐험대는 1906년 6월 17일 파리를 떠나, 열차편으로 모스크바를 경유해 타쉬겐트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짐이 당도할 때까지 두 달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후 탐험대는 마침내 8월의 마지막 날 카쉬가르에 도착했다.
펠리오 일행은 동쪽의 쿠차로 가서 당분간 그 일대를 중심으로 발굴작업을 펼칠 계획이었다. 그러자면 툼슉을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카쉬가르에서 6주간의 준비를 마치고 여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툼슉의 유적은 무슬림과는 관계가 먼, 적어도 800년까지는 번영을 누린 초기 불교도의 도시였음이 밝혀졌다. 펠리오가 그곳에 잠깐 머무르는 동안 이 같은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승마용 채찍으로 무심히 땅을 쿡쿡 쑤시던 펠리오는 그레코 불교의 양식이 뚜렷한 소립상 한 점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6주 후에 그들은 꽁꽁 언 몸으로 채색조상 등 많은 유물을 싣고 쿠차를 향해 서둘러 길을 떠났다.
펠리오는 대량의 불교문헌이 나오고, 또 그중에 미지의 문자로 씌어진 것이 많음을 보고 득의만면했다. 8개월 동안 쿠차에 머물면서 풍성한 수확을 거둔 프랑스 탐험대는 우루무치로 이동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재충전한 다음 사막을 넘어 돈황으로 갈 생각이었다.
세 사람이 돈황에 도착해 천불동을 찾았을 때, 필사본의 동굴은 굳게 잠겨져 있었고 왕 도사는 자리에 없었다. 며칠 뒤 그들은 돈황 읍내에서 왕을 찾아내 추궁한 끝에 왕에게서 필사본을 보여주겠다는 승낙을 받아냈다.
이때 당시 왕은 스타인에게서 받은 기부금도 동이 나버렸기 때문에 자신의 복원사업을 위해 새ㅗ운 재원이 필요한 상태였다.
마침내 돈황에서 열쇠가 도착해, 펠리오는 거대한 이 천불동에 온지 한 달여 만에 그 비밀의 동굴에 들어갈 수 있었다. 펠리오는 먼지투성이의 꾸러미들을 뒤지면서 길고 숨막히는 3주일이란 시간을 보냈다.
펠리오는 자신이 따로 챙겨놓은 두 부류의 필사본을 팔라고 왕을 설득했고, 결국 5백 테일이란 금액에 합의가 이루어졌고, 그 문헌 더미들은 선편으로 프랑스로 운송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포장되었다.
마침내 펠리오는 1909년 10월 24일 그가 떠난 지 만 3년 만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영웅으로 환호를 받았지만, 동시에 수상한 기류도 감지할 수 있었다.
★ 서평
『실크로드의 악마들』. 원 제목은 『실크로드의 외국 악마들(Foreign Devils on the Silk Road)』이다. 왜 저자는 굳이 외국 악마들이라는 말을 사용했을까? 역자의 서문에서와 같이 '외국 악마들'이란 제목은 19세기의 개국 이후 중국인들이 서양에서 온 외국인들을 가리켜 양귀자, 즉 서양 도깨비라고 멸시하여 붙였던 호칭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서양인 학자들인―현재 중국의 신강 위구르 자치구인 서 투르케스탄 지역에서 사라진 옛 유적과 유물을 발굴해 왔던 서양인 탐험가들―스벤 헤딘, 오렐 스타인, 폰 르콕, 펠리오 등은 분명 이 책에서는 '유물 약탈자'로 소개되고 있다. 물론 이들의 행위가 '약탈'임에는 틀림없지만, 한편으로는 유물을 그대로 방치했다면 원주민들과 이교도들에 의해 더 많은 훼손이 가해졌을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이들의 행위에 대해 조금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소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가 정당한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나의 관점에서는, 그들의 탐험동기나 목적, 그리고 그들의 노력은 인정되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나 그들의 유물약탈행위는 분명 매우 부당한 것이다. 물론 중국정부의 유물들에 대한 소홀함도 문제시 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서세동점의 시기에 중국은 근대화의 움직임이 매우 격렬했던 시기였고, 물론 자주방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고로 중국정부는 유물에 대한 관심을 쏟기보다는 정국의 안정을 보다 중요시 했을 것이고, 그리하여 서양의 학자들, 탐험가들이 그쪽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게 된 것이다.
과거 서양인들이 최초로 유물을 발굴한 뒤, 임시로 구제하여 보존하고 그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실크로드의 역사를 재구성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 그 유적과 유물에 대해 과거의 주인들이 당당하게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고, 서양인들이 유물을 구제하였다는 사실 역시 그대로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이상적이고 이성적인 해결책은 물론 유물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겠지만, 과연 국제 사회에서 이처럼 이상적인 방안이 실현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자칫 완전히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유적과 유물에 대한 최초의 발굴자이자 연구자로서 주장할 수 있는 대가, 그리고 그 유적과 유물에 대한 원래 주인으로서 내세울 수 있는 권리, 이 두 가지 주장에 있어서 어떤 합의점을 도출해 내야만이 이에 대한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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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3.11.20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3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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