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한나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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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본론
1. 학술과 사상
2. 궁중무도
3. 민간무도
4. 종이
5. 지리학
6. 천문학
7. 화학
8. 한대 문학
9. 회화
10. 아악
11. 악기
....

[3] 결론

본문내용

. 실을 사용한 자수와 안료를 쓴 그림이 그 난제를 해결해 주었다. 그러나 자수는 아주 시간이 걸리는 일이어서 고급 통치자가 아니면 의복에 많은 수를 놓기가 어려웠는데 이와 같이 수놓은 옷단은 명예와 권위의 상징으로 귀족들이 아랫사람에게 하사하였다. 복장의 색으로 말하면, 한 이전에는 주홍색을 가장 존귀하게 여겼다. 한 이래는 음양오행학설의 흥성으로 중앙의 황색은 황실의 상징으로 대표되었고, 동방의 청색은 선비의 평상복이 되었다. 남방의 홍색은 경사가 되었고, 서방의 백색은 상사가 되었으며, 북방의 흑색은 노인의 복색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청대에 이르기까지 황색과 자주색은 단지 소수만이 입을 수 있는 색이었다.
·장의(長衣) : 장의는 남녀, 귀천, 혼상(婚喪), 경사 등에 모두 적합한 형식이다. 한대에 들어선 이후에 유가가 득세하자 장의는 문사의 일상복이 되어 줄곧 명조까지 유지되었다. 《예기》 심의편에는 장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문文의 일에도 입을 수 있고, 무武의 일에도 입을 수 있다. 빈상 相을 맡아서도 입을 수 있고, 군대를 거느릴 때도 입을 수 있다. 이 옷은 몸을 두루 감싸면서 바탕이 소박하고 쉽게 만들 수 있으니, 조복과 제복 다음으로 가장 좋은 옷이다.』하지만 노동자에겐 장포는 필경 불편하게 마련이었으므로 단의短衣를 입었다. 그러나 단의는 두 다리를 추위와 상해의 고통에서 보호할 수 없었으므로 폭이 좁은 천조작으로 종아리에서 무릎까지 둘러 싸매게 되었다. 이런 각반형식이 발전되어 위부분과 이어지면 오늘날의 바지가 된다. 일반적으로 바지는 한대에 와서야 발전되기 시작했으며, 게다가 선비와 군자가 입는 옷이 아니었다.
·모자 : 모자는 장식물이 될 수도 있고, 또 추위와 더위를 피하고 머리를 보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자를 쓰는 제도가 보급되기 전에는 단지 높은 권위를 지닌 자만이 모자를 쓸 수 있었으므로 한대에도 선비는 관을 쓰고 일반 백성은 단지 건을 썼다. 아주 후대까지도 모자는 여전히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
·신발 : 신발은 지금 우리가 항상 신는 물건이다. 그러나 우리는 옷을 입고 모자를 썼으나 신발을 신지 않은 미개화민족을 볼 수 있다. 옛날에 신발을 신었으면서 옷과 모자를 걸치지 않은 민족은 없었으니, 신발이 모자 이후의 산물임을 알 수가 있다. 아주 늦게까지 신발은 여전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여 신발이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신발을 신게 된 것은 반드시 문명의 예의와 관련이 있다. 한 대 전에는 묘당과 같이 장엄한 곳에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 하는 습관이 있었다. 신발에 묻은 진흙이나 오물이 청정한 묘당을 더럽힐까 두려워서였다. 깨끗한 발로 당에 올라가 예를 올려야 했으므로 임시나마 물건으로 발을 싸매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한 것이 신발문화로 발전되었다. 한대 《석명》의 의복항에서는 신을 신는 목적에 관하여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리履는 예이다. 발을 신으로 장식하는 것은 예의를 차리기 위함이다. 신발창이 두 겹으로 된 것을 석 이라고 한다. 두 겹으로 만든 것은 긴 의식 동안에 사용하기 위해서이며, 혹은 땅의 물기나 진흙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신발창은 마가죽으로 만든다.』
초기에 신은 권세를 가지고 있던 귀족들만이 신었었지만 한대에 오면 이미 사람마다 신을 신도록 발전되었다. 처음에는 단지 가죽으로 발을 싸맨 것에 불과했으나, 점차 일정한 모양으로 신발과 버선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동주와 한대에서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좌석이나 바닥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신을 벗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신과 버선을벗지 않으면 크게 불경스러운 행위로 간주되었다. 《좌전》에는 노애공哀公 25년에 저사성자楮師聲子가 연회석상에서 버선을 벗지 않았기 때문에 질책을 당한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후세의 습관과는 서로 반대가 된다.
〈결론〉
한나라의 문화들은 전통적인 문화를 좀 더 체계적으로 발전시킨데에 의를 둘 수 있다. 한나라의 발전된 문화들은 가히 그 제국의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크게 몇 가지로 구분해 정리하자면, 학술·사상의 분야에서는 전한 전반기(前半期)는 도가사상과 법가사상, 특히 후자가 전제적 통치의 현실면에서 지도이념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무제의 치세에 동중서(董仲舒)의 헌책(獻策)으로 오경박사(五經博士)가 설치되어 유교의 국교화가 비롯되었다. 이런 경향은 원제(元帝)의 시기부터 결정적으로 되어, 유교는 국가통치·사회질서의 기본적 이념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후한시대로 계승되었다. 또한 과학적 지식의 분야에서도 진보와 그 체계화가 이루어졌는데, 유흠(劉歆)의 《삼통력(三統曆)》은 중국의 천문학·역법(曆法)의 틀[型]을 만들었으며, 수학의 저작으로서 《구장산술(九章算術)》, 의학을 체계화한 《상한론(傷寒論)》 《황제내경(黃帝內經)》 등은 특히 유명하다. 마지막으로 미술·공예 대부분은 예속적 직인층(職人層)에 의하여 제작(制作)되었다고 생각되나, 이 분야에서도 현저한 전진이 있어, 중국의 전통적인 기본 양식으로 형성된 것이 많다. 회화(繪畵)에는 칠화(漆畵), 고분벽화 등이 있으며, 조소(彫塑)에는 화상석(畵像石)이나 이상(泥像) 등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발달된 한나라의 문화들은 후에 찬란한 중국 문화에 많은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물론 현대로 내려오면서 그 유물이나 흔적들이 보존되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말이다. 한나라에 대해 조사하는 과정 속에서 조원들이 나눠서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사마천의 ‘사기’나, 무제에 관한 자료들은 그 양이 방대하였지만, 문화에 대한 부분을 찾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따라서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것들을 위주로 찾긴 하였으나 자료의 내용이 부실한 감도 없지 않다. 자료의 양이나, 양질의 레포트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계기로 한나라에 대해서 심화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굉장히 값지게 느껴졌다.
참고 문헌
①패트리샤 버클리에브리 지음, 이동진 윤마경 옮김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이브리지 중국사" 『시공사』
②허웅진 지음 " 중국 고대 사회 "
③김동성 지음 " 중국문화사" 『을유 문화사』
  • 가격1,300
  • 페이지수17페이지
  • 등록일2003.12.14
  • 저작시기2003.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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