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재 김득신(金得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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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전반적인 특징들

2. 김득신의 작품들

본문내용

화원이었던 응리(應履)의 아들이며, 응환(應煥)의 조카이다. 화원으로 첨중(僉中)을 지낸 한중흥(韓重興)의 외손자이다. 동생인 석신(碩臣), 양신(良臣), 그리고 아들인 건종(建鍾), 수종(秀鍾), 하종(夏鍾)이 모두 화원이었다. 김득신 또한 화원으로 초도첨사(椒島僉使)를 지냈다.
197년 정조의 초상(정조어진(正祖御眞))의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리는 데에 이명기(李命 基), 김홍도(金弘道), 신한평(申漢坪)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풍속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도석인물(道釋人物)화, 산수화, 영모(翎毛)화도 잘 그렸다. 김홍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풍속화에 산수를 배경으로 삽입시켜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 김홍도 풍속화를 계승. 서민생활을 주로 표현 ◈
조선후기 풍속화의 내용과 형식에서 김홍도를 가장 충실히 계승한 후배 화원은 김득신이다. 때로는 풍속화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 등에서도 두 화가의 필법이 흡사하여 낙관이 없는 경우에는 혼란을 초래할 정도이다. 또 김홍도 화풍이 형식화 되어가는, 풍속화의 퇴영을 예고하는 출발선상에 놓인 화가이기도 하다.
김득신은 화원 집안의 명문 출신으로 정조가 ‘김홍도와 더불어 백중하다’고 평할 정도로 기량을 인정 받았다. 그러나 만년에 오면서 창신(創新)한 맛보다는 기존의 도상을 재구성하는데 그치고 마는 답보적인 길을 밟았다. 오히려 앞의 풍속화에 비하여 현실감이나 회화적인 맛이 퇴행한 인상마저 든다.
김득신의 형식화는 김홍도가 말년에 관념화로 기울면서도 그 인생관에 걸맞은 무르익은 예술성을 구성 하였음과 잘 비교된다. 아홉 살 차이 나는 김홍도와 김득신의 시대 감각의 변화 곧 1700년대 후반과 1800년대 초반 사회 변동의 폭이 그만큼 컸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의 같은 시기이면서도 두 사람의 사회적 환경이 달라졌음은 그 교우 관계에서의 차이를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키워드

김득신,   현보,   긍재,   홍월헌,   파적도,   귀시도
  • 가격7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3.12.17
  • 저작시기2003.12
  • 파일형식워드(doc)
  • 자료번호#238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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