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역사와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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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의 역사와 대외관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고려초의 국제정세

2. 태조 왕건의 북방정책

3. 고려 전기 유력한 성씨의 출신지역

4. 고려의 영토인식

5. 대외정책 - 대 거란, 여진, 송 정책

6. 이자겸의 난

7. 묘청

8. 김부식과 {삼국사기}
...

본문내용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인조의 방조에 의한 독살일 가능성이 있음.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이자 원손인 11세의 석철을 세자로 세우지 않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움. 이가 효종.
- 효종과 북벌론, 조선중화주의
효종은 왕권에 제약적 요소로 작용하는 친청 주화파를 제거하고, 그들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척화계 산림세력을 적극 등용함. 김집, 송시열, 송준길, 권시, 이유태 등으로 대표되는 서인들과 허적, 허목, 윤선도 등 남인들을 등용. 이들은 대개 주자 성리학에 투철하면서, 反淸의 정서가 강하였고, 청에 굴복한 조정에서 벼슬하기 보다는 재야에 은거하는 길을 택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음. 이 때 진출한 산림 세력은 김자점 등을 탄핵하여 유배보냄. 김자점은 귀양지에서 역관을 청으로 보내 조선의 군주가 북벌을 도모한다는 밀고를 하게 하는 등 반역을 꾀하다가 결국은 처형됨. 결국 효종은 북벌계획을 비밀리에 유포시킴으로써 국내정세를 긴장시키고, 이 긴장책을 이용 친청 세력 제거하고 왕권의 강화를 추구한 것. 실제로 효종은 북벌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왕권의 안정과 친청세력의 도전을 예방하기 위하여 수도를 중심으로 강력한 호위 군사력을 구축함. 수어청(남한산성) 재정비, 어영청 확대, 훈련도감군 증강 등은 그 예임.
그러나 외양 = 북벌론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음. 오히려 효종 5년에는 청의 요구에 따라 청과 러시아의 국경분쟁으로 인해 길림에 군사를 파견해야 했던 처지. 북벌론은 점차 내수외양론(內修外攘論) 정도로 일반화함. "(내수외양)한다면 … 지금의 형세로 군사를 일을켜 (청을) 쳐서 정벌하고 수치와 원한을 풀지는 못한다해도 이것이 역시 자강의 도를 다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공통된 정서임. 즉 청과 공식적으로 사대관계를 맺고는 있지만, 내면으로는 체제를 정비하여 언젠가 오랑캐인 청을 물리친다고 하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음.
) 물론 내수의 방법을 둘러싸고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 일부는 토지제도는 그대로 둔 채 부세제도를 공정하게 운영하는 수준의 체제정비를 주장하기도 하고(송시열을 위시한 대부분의 유학자들), 일부는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을 포함하여 국가체제 전반을 정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함. (유형원, 이익, 홍대용, 정약용 등 '실학자'들) 보통 이러한 개혁안의 차이를 당파의 차이에 따라 설명하는 경우가 많지만, 같은 당파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개혁론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음. 각 당파에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등장함. (현재는 이들을 통칭해서 '실학파'라고 부르는 형편임.)
그 후 북벌의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이제는 對明義理論·朝鮮中華主義 등의 형태로 자신들의 논리를 세련화함. 17세기 이후 조선사회는 周室→明→朝鮮으로 사고의 틀을 전환시킴으로써 조선이 오랑캐인 淸을 대신해 중화의 적통을 계승한 중화문화의 담당자라는 朝鮮中華主義를 성립시켰던 것. 이는 비록 현실의 청과 조선은 사대관계이지만, 내면으로는 조선이 곧 중화를 계승하고 있다는 의식임. 이러한 의식은 한편으로는 중화문명에 눈이 멀어 망해버린 명을 높이는 시대착오적인 의식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에서는 강대국의 힘에 눌렸지만 내면에서는 그들보다 오히려 우월하다는 자존의식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 한말에 "청나라는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취급, 서울을 중국의 지방도시로 격을 낮추기 위해 한성이라 불렀다"고 말했다. 중국의 도시명 중 '성'(城)은 지방 도시를 의미하며 역사상 한 나라의 수도였던 도시는 북경(北京), 남경(南京), 개경(開京)처럼 '경'(京)을 붙이는 것이 관례하고 한다. 청나라의 지명 강등(降等)에 한국이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아 중국은 오늘까지 '관습에 따라' 서울을 '한성'으로 낮춰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명 속에는 '한국은 중국의 속방국가'란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라고 하는 의식은 중국측의 일방적인 생각이며, 조선인들은 중국과 사대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결코 속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함.
조선중화주의는 성리학에 입각한 조선 고유의 문화 창달에 기여하여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전반에는 眞景文化를 이룩함. (진경산수화, 동국진체, 조선의 청화백자, 풍속화…) 심지어 정조대에는 夷狄인 元과 淸에 의해 편찬된 宋史와 明史를 中華인 朝鮮이 바로잡기 위해 『宋史筌』을 편찬할 정도로 조선중화주의가 역사편찬의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중화주의의 주도층은 조선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서인계, 특히 노론이 그 핵심을 이룸. 이들은 이미 숙종 29년에 송시열의 유지에 따라 萬東廟를 세워 명의 신종과 의종을 제향하였고, 군왕 역시 조선 중화주의를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숙종 31년에는 창덕궁의 후원에 大報壇을 설치하여 조선중화주의의 이념을 국가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중화주의는 19세기 이후 북학론이 강력해지면서 점차 약화되기 시작함. 특히 북학론은 淸朝가 이룩한 문명적 성취를 찬탄하면서, 그동안 조선 고유의 문화적 자긍심을 고루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비판하고 청 문명에 대해 개방적 자세를 취할 것을 요구. 이러한 논의들은 주로 청조와 교류가 잦던 경화(京華)의 세도가와 그 자제들에 의해 주도됨. 한말에는 개화론으로 이어짐.
반면 조선중화주의의 흐름 역시 한말에는 위정척사론으로 이어진다. 19세기에 이르러 세도정국 하에서 정권에서 소외된 방대한 재야지식층인 儒林들은 힘의 논리와 약육강식의 논리로 세계를 제패하려는 서구제국주의와 일본제국주의의 도전에 직면하여 衛正斥邪思想을 제창하게 된다. 위정척사사상은 그 척사적 측면과 위정적 측면의 사상적 기원이 각각 17세기 북벌론과 존주론으로까지 소급될 수 있는 것으로, 송시열의 9대손 宋秉稷이 편찬한 『尊華錄』과 華西學派의 『宋元華東史合編綱目』의 저작에서 보이는 강한 尊華思想을 통해 보건대 19세기 衛正斥邪思想이 조선후기 사회적 토양에서 키원낸 문화자존의식인 조선중화주의를 끝까지 사수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견지하였다는 자주성과 주체성은 마땅히 재평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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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1.15
  • 저작시기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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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4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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