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에 나타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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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 1장 서 론

제 2장 바위와 인간의 관계

제 3장 바위의 종류

제 4장 우리 풍경 곳곳에 나타난 바위의 모습
Ⅰ. 서산 마애불에 나타난 신앙의 의미로서의 바위
Ⅱ. 울산 바위의 전설에 나타난 민중의식
Ⅲ. 장승에 나타난 바위의 모습
Ⅳ. 하르방에 나타난 민족의 모습

제 5장 결론

본문내용

사인비인'이 되는 셈이다. 또한 장승의 역할과 형태는 조선 시대 시문학에 흔히 거론되지만, 판소리<적벽가>에도 적절히 서술되어 있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한 뒤 도망하면서 장승을 만나는 대목의 사설을 보면,
....웬 놈의 얼굴인지 방울준 주먹코에 주토칠 많이 하고, 써렛니 개털수엽 뱃바닥에 새기기를 '자형주관문(自型州官門)'으로 남거오십리(南踞五十里)'장승이라. 큰 길가에 우뚝 서니 입 있으나 말을 할까 발이 있어 도망할까. 부끄럽기 측량없어, 낯은 일생 붉어 있고, 분한 마음 못 이기어 눈은 항상 부릅떴네. 불피풍우(不避風雨)혼자 서서 래인거객(來人去客) 호송(護送)터니.'
) 앞의 서적
두 사설 외에도 장승에 대한 민간의 설화나 속담에는 한결같이 미련하고 예절없고 멍청한 화상으로 장승이 묘사된다. '벅수 입에 밀가루 바르고 국수 값 내린다'는 속담이나 '멍청이 벅수 같은 놈' 등의 표현처럼 '사신비신(似神非神)으로, 장승을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비신비인(非神非人)'으로 여겨 온 것이다.
) 장승은 분명히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고 질병이나 악귀로부터 마을을 보호해 주는 수호신으로서 신성(神性)을 지닌 경배의 대상이면서도, 그처럼 노리갯감으로 표현한 점은 장승에 대한 친근감을 나타낸 증거이다. 여기서 우리는 삶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민중의 익살과 해학미를 엿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조선 후기의 돌장승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상이든 미소년상이든, 나아가 벽사(抗邪)의 의미를 강조한 도깨비상이든, 그 형상을 과장한 변형으로 꾸며냈으나 무섭다거나 괴기스런 표정을 찾아보기 힘들다. 또 경기도 광주 엄미리나 공주 탄천의 장승 등 그런 전통이 잘 계승된 민간 마을의 추상화된 나무 장승 역시 마찬가지이다. 민중의 품성이 진솔하게 실린 결과로, 질박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단순화시킨 조형미를 갖춘 것은 그 까닭이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의 장승들은 생산에 직접 참여하는 민중의 공동체적 생활 속에서 삶의 정서를 형상화한 예술로서 평가하기에 손색 없는 민족 조각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충무의 돌장승 토지대장군(1905년)을 비롯해서 구한말 이후에 제작되는 근래의 돌장승이나 나무 장승을 보면 대부분 괴기스럽게 변질되어 험상궂은 표정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우리네 근 현대사의 각박한 현실 그대로를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Ⅳ. 하르방에 나타난 민족의 모습
제주를 상징하는 것 중에 하나인 돌하르방
) 1971년 8월 25일 지방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성읍리의 것이 141.4cm, 보성 안성 인성리의 것이 136.2cm이다. 조선시대에 제주시는 제주목(濟州牧)의 소재지였고 성읍리는 정의현청(旌義縣廳), 보성 안성 인성리는 대정현청(大靜縣廳)의 소재지였다. 본래는 주현(州縣)의 성문 앞에 세운 것을 현재의 자리에 옮겨놓았다.
은 옛적에는 우석목, 무석목, 돌하르방 등 여러가지 명칭으로 부르다가 오늘날에 돌하르방이 대표적인 명칭이 되었다. 제주도 지방 민속자료 제2호인 이 돌하르방은 제주시에 21기, 대정읍에 12기, 표선읍 성읍리에 12기등 도합 45기가 있으며 도시개발 등으로 인하여 지금은 당초 세워져 있던 자리가 많이 바뀌어 삼성혈, 관덕정, 제주시청, 제주대학, 제주방송국, 제주공항, 성읍리 등 여러곳에 산재해 있는데 본래는 제주목(제주시), 대정현(대정읍), 정의현(성읍리) 등 각 주현성의 성문 앞에 세워져 있던 것이다. 석상의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부리부리한 큰 눈에 흡사 자루병 같은 코를 하고, 입술은 단정히 다문 얼굴에 둥근테가 있는 모자를 써있고, 두 손은 배에 나란히 모아 위엄있게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석상의 크기는 제주시의 것이 가장 커서 평균 신장이 181.6cm, 성읍리의 것이 141.4cm 이다. 이 석상이 만들어진 시대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 역할은 성문 앞에 서서 수호신적 기능을 했던 것으로 추정 하고 있으며 육지부의 장승의 기능과 유사했던 것으로 보고있다. 지금은 이 당초의 기능은 사라지고 대신 관광 기념풍의 모델 역할을 맡아 제주를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하르방이 석상들이 만들어진 연대는 담수계(淡水契) 《탐라지(耽羅誌)》에, 1754년(영조 30) 목사(牧使) 김몽규(金夢奎)가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증이 없어 알 길이 없고, 3현(縣)에 있는 것을 모두 같은 시기에 만들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석상의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큰 눈에 자루병 같은 코를 가졌으며,입술을 다문 얼굴에 감투를 썼고, 두 손을 배에 나란히 모으고 서 있다. 제주시에 있는 것과 성읍리에 있는 것은 기석(基石)을 받쳤고 특히 제주시의 것은 기석 전면에 O형과 L형의 굴각(掘刻)이 있다.
제 5장 결론
이처럼 한국인에 있어서 돌과 바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한국인에 있어 그것의 의미는 일종의 무형물이 아닌 때로는 때로는 기복신앙에 기초한 유신(有神) 적인 유형물로서의 의미, 그리고 생활 속에서의 고락을 함께하는 동반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유치환의 시에서 나타난 것처럼 바위는 강개한 이미지를 나타내는 한편, 김동리의 소설에 나타난 것처럼 체념의 의미, 샤머니즘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본 논문을 집필함에 있어 어려움을 겪었던 것도 여기에 나타난 자료의 큰 부재에 있었다. 바위와 돌에 관한 각종 논문 및 단행본을 뭉뚱그려 하나의 글로 집필한다는 사실에 있어서 큰 부담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많은 자료들을 하나로 수집하고 이를 풍경학적인 의미로 고찰한다는 자체에 대한 것이 어려움이 있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대성, 윤열수 공저,『한국의 性石』, 푸른숲 1997
김두하, 『벅수와 장승』 집문당, 1990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 1995
논문
오재숙,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돌’의 상징성 연구』,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2000
이종철, 『한국 性신앙 연구 :한국인의 性표상과 의미에 관한 연구』,영남대 대학원, 2001
정웅천, 『설악산 울산바위 주변의 Tor에 관한 연구』, 강원대 교육대학원, 1994
우일제, 『 소설 '바위' 의 구조 연구』, 숭전대, 1983

키워드

바위,   성석,   남근,   성기,   남아선호,   남존여비,   선돌,   하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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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4.19
  • 저작시기2004.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6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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