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의 문학 분석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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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 시대의 문학 분석 정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시조
향가
고려가요
경기체가
악장
가사

본문내용

성을 기원한 5장 형식의 노래이다 이들은 모두 경기체가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악장으로서의 구실이 중요했고 또 그 기능과 지향이 분명히 악장이어서 악장가사 라는 책에 실리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월인천강지곡은 용비어천가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세종의 소헌 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석보상절을 국문으로 짓게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세조 스스로가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따라서 석가의 일대기를 노래로 지은 것이므로 다른 악장 작품들처럼 왕업의 찬양이나 기원을 노래하는 악장의 일반적 지향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비록 왕실이나 임금에 대한 찬양은 아니지만 불교 찬가라는 점에서 보면 찬가로서의 성격이 같고 더구나 그 형식이며 표현이 용비어천가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에서 악장에 포함 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악장 양식은 그 기능이나 지향이 왕실과 국가의 찬양과 기원에 있었던 것이기에 국가의 기틀이 확립됨과 동시에 신흥국가의 참신한 기운이 사라지자 그 필요성도 감소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조선조 초기 이후에는 새로운 악장이 더 이상 창장 되지 않았으며 그런 찬양과 기원이 왕실이나 국가보다는 개인 차원의 것으로 인식되면서 강호사시가 에서 보는것처럼 임금님 은혜에 대한 감사로 바뀌게 된다.
가사
가사는 두마디 씩 짝을 이루느 율문의 구조만 갖추면 내용은 무엇이든 노래했던 양식이다 따라서 그 길이도 자유롭게 길어질수 있었으므로 장가라고도 했다 형식적인 요건이 단순하기 때문에 향유층도 매우 다양할 수 있었으며 이 점이 가사의 내용을 다채롭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되기도 했다 가사느 대부분의 작품이 우리말로 표기되었는데 그 중에는 신득청의 역대전리가나 나옹화상의 승원가 처럼 한자표기를 주로 하고 어미나 조서만을 향찰표기로 한 것도 있다 그러나 작품에 따라 한자투가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을뿐 대체로 우리말로 되어 있어서 우리말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이중 순 우리말을 주로 한 작품은 우리말의 묘미를 마음껏 살리면서 표현한 것이 많고 그 내용도 서정적인 경향인데 반해 한문투로 된 작품은 표현도 세련되자 못해서 어색하고 내용은 교훈적이거나 이념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초기의 가사 작품은 가창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노래의 제목에 **별곡 이라고 한것이 많아 고려때의 속요나 경기체가의 제목과 우사성을 보이는데 고려때의 관행으로 미루어 보아 가창을 하는 전통에서 출발한 것을 짐작할수 있다 또 초기의 가사 작품에 관한 기록에 가창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것으로 보아서도 가창된 사실을 짐작할수 있다 그러나 그 음악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그러한 가창의 관행이 오래 지속되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가사 작품을 읽는 주된 방법은 선율 없이 흥얼거리는 단조로운 어조의 낭송이 주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점에서 본다면 고전시가 양식가운데서 ㅇ음악과 분리되어 향유되었던 유일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경계로 하는 17세기부터의 후기 가사에 오면 몇 가지 특징적인 변화가 생긴다. 작자층의 확대, 제재의 변화, 표현방식의 다양화,대상을 보는 시각의 다변화 등이 그것인데 이런 현상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들이다. 사대부로 제한되었던 가사의 작자가 부녀자와 평민층으로 확대됨으로써 가사 작품으로 형상화되는 관심사가 다양해졌고, 또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각각의 삶이 다른 만큼 변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에 따라 언어에도 당연히 변화가 왔다. 더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고 하는 큰 전쟁을 두 차례나 겪으면서 언어가 급격하게 변한 사실이 가사 작품의 표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정중하고 고아한 표현으로부터 일상적이고 노골적이어서 그전에는 문학의 언어가 될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말까지 이 시기의 가사에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경건한 태도로 사물을 바라보고 형상화하던 데서 희작적인 태도로 바라보고 표현하는 풍자적이고 희화적인 작품으로 변모하는 경향까지도 초래하게 된다. 정작 전기 가사와 동일한 작풍을 보인 작품은 강호에서 은일의 삶을 표방한 차천로의 강촌별곡,조우인의 매호별곡,남도진의 낙은별곡 등이다. 이 중 조우인은 정철의 성산별곡을 본받아 매호별곡을 짓고, 사미인곡을 본받아 자도사를 그리고 관동별곡을 본받아 속관동별곡을 지을 정도로 전대의 기풍을 계승했다. 후기 가사가 체험적 구체성을 중시하고 현실의 문제를 가사의 제재로 전면에 내세우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념적인 삶보다는 현실적인 삶에 더 눈을 주게 되었다는 것을 반영하는데, 그러한 변화가 조선조 전기와 후기의 사회를 구분해 주는 특징이기도 하다. 가사는 그러한 변화를 날카롭게 반영하고 있는데, 이는 가사라는 양식이 정형적 제약이 덜할 뿐더러 무엇이든지 노래할 수 있었던 내용적 자유로움을 지닌 데서 가능했던 변화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가사의 구체성 지향은 한양의 풍물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풍속도에 가까운 한산거사의 한양가나 정학유의 농가월령가 등을 낳기도 했다. 한양가는 일반 서민의 관점에서 서울 거리의 모습이며 물건 그리고 놀이의 종류까지 자세히 묘사했고 농가월령가는 한 해의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다달이 농촌에서 할 일을 세세하게 노래하면서도 알맞은 율조를 얻어 효과를 더하고 있다. 전자가 서울의 모습을 공간적으로 노래했다면, 후자는 농촌의 모습을 시간적으로 노래했다는 점에서도 서로 짝을 이루면서 대비되어 흥미롭다. 후기 가사가 실상의 구체성을 드러내는 경향으로 나아간 점과 가사 작자층이 하층민으로까지 확대됨으로써 당대 사회의 현실적 모순을 고발하는 성격의 작품이 나오게 된 것도 이 시기 가사문학의 특징이다. 주로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반에 나타나는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인한 비리와 삶의 고난을 고발한 작품도 있다. 군역의 가혹함으로 인해 실향민이 되어 떠도는 삶을 묘사한 갑민가, 전라도의 탐관오리가 학정을 일삼으면서 자신은 호화로운 뱃놀이를 하는 것을 고발하는 합강정가, 경상도 거창 지방에서 학정으로 인한 괴로움을 부녀자의 목소리로 노래한 거창가, 전라도 정읍에서 민란이 일어났을 때 그 학정을 노래했던 정읍민란시여향청요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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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4.05.23
  • 저작시기2004.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2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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