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세자, 아버지와 아들의 그 풀 수 없는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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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왕과 세자, 아버지와 아들의 그 풀 수 없는 딜레마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 차


■ 세자에 대하여
1. 조선시대의 세자
2.세자책봉
3.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
4. 대리청정
1) 세자의 대리청정
2) 대리청정의 시행
5. 세자의 교육기관
1) 보영청
2) 대리청정의 시행
6. 세자의 교육
1) 교육
2) 세자의 교육 - 서연
3) 국왕교육 - 경연(經筵)

■ 영조와 사도세자
1. 당시의 정치상황
2. 영조의 등극과 사도세자의 책봉
3. 영조의 출신과 임오화변
4. 추락한 영조에 대한 신의
5. 영조와 사도세자

■ 선조와 광해군
1. 세자 책봉
2. 선조와 광해군..그리고 인목대비
3. 선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
4. 광해군과 인목대비, 그리고 인조반정
5. 인목대비 김씨와 광해군의 유폐
6. 선조와 광해군

■ 왕과 세자, 아버지와 아들의 그 풀 수 없는 딜레마

본문내용

목대비 김씨와 광해군의 유폐
광해군은 왕위에서 쫑겨난 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곳에서도 모진 목숨을 18년간이나 더 연명하다 기구한 일생을 마쳤다.
아들과 친정식구들을 모두 잃은 인목대비나 만년을 유배지에서 처절하게 살다 죽은 광해군이나 모두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6. 선조와 광해군
조선시대에는 왕이 신료들에 의해 쫓겨난 경우가 두번 있었다.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이 그들인 것이다.
광해군은 세자로 있을 무렵부터 폐위될 때까지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처리했지만, 그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대북파의 장막에 의하여 판단이 흐려졌고, 인재를 기용함에 있어 파당성이 두드러져 반대파의 질시와 보복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뒷날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책략과 명분에 의하여 패륜적인 혼군으로 규정되었지만, 실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같은 반정에 의하여 희생된 연산군과는 성격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임란시의 활약과 전후의 수습을 위해 실리적인 외교정책 등 내정 안정에 주력했던 그가 친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폐서인하는 데까지 이르러 폭군으로 지칭 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왕의 정통성 문제라 봐야 할 것이다.
당시 세자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아버지 때문에 광해군은 왕으로 즉위해서도 왕위의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형제간의 살육과 어머니를 폐위시키는 사건을 일으키게 되며, 이를 계기로 신하들에게 쿠데타의 명분을 주어 왕위에서 축출당하게 된다.
이에서 보듯, 조선시대 당시는 왕과 세자간에 있어 부자의 정보다도, 보이지 않는 권력 대립의 관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왕과 세자, 아버지와 아들의 그 풀 수 없는 딜레마
군력이란 피를 나눈 형제간이나 부자간에도 나눠 갖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왕조 국가에서 세자의 자리란 절대권력 서열 제 2인자의 위치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덜 떨어진 서열 2위의 인물이 무난히 권력을 이어받는 경우는 많아도, 오히려 걸출한 능력을 지닌 서열 2위의 인물이 무난히 권력을 이어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뛰어난 인물이 서열 2위에 있게 되면 그 주위에 현재의 절대권력자에 불만을 가진 개혁 세력들이 모여들게 되고 이것이 서로간의 노선 갈등으로 이어져서 절대 권력자가 보기에는 자신의 권력에 대한 누수 현상으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특히 권력자가 자신에게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을 경우는 서열 2위의 인물이 더욱 배겨나기 힘듭니다.
우선 역사적으로 몇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당 태종 이세민도 아버지를 도와 중국을 통일할 때 혁혁한 공을 세워 2인자의 지위를 누렸지만 태자 책봉 때는 형에게 밀렸으며 결국 제위를 이어 받기 위해서는 형제들을 죽여야만 했다. 명나라 성조 영락제도 아버지를 도와 건국에 큰 공을 세웠으나 연왕으로 북경에 머무는 사이 당시 수도 남경에서 태조 홍무제가 죽고 죽은 형의 어린 아들이 자신을 제치고 제위에 오르자 조카와 그 주위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제위를 빼앗는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무신정변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충헌도 동생 최충수와 함께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지만 결국은 절대 권력을 위해서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려던 동생을 죽이고야 만다. 조선 태종 이방원 역시 조선 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웠으나 왕위가 이복동생들에게 돌아가려 하자 결국 왕위를 얻기 위해 자신의 손에 그들의 피를 묻히고야 만다. 따라서 이방원은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던지 왕위에 올라서도 항상 누군가가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세자였던 양녕대군의 인물됨이 뛰어남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자신의 정책에 불만을 지닌 세력들이 세자인 양녕대군 주위에 모여들자 몇차례 양위 파동을 벌여서 세자 주위의 사람들을 확인한 후, 그들을 다 죽이고 마지막에는 세자마져 내쫑고 만다.
세자와 갈등을 빚었던 다른 인물로는 선조 임금을 들 수 있다. 선조는 인종과 명종이 잇달아 어린 나이에 후사 없이 죽으면서 왕에 추대됐으며 조선 왕조에서는 처음으로 방계에서 왕이 된 인물입니다. 따라서 선조 임금 역시 자신의 신분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으며 이 컴플렉스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해 태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란의 와중에서도 수차례 양위 파동을 벌인다. 결국 선조는 왜란중 군대를 모집해 목숨을 걸고 싸운 광해군을 버리고 어린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다가 뜻을 채 이루기 전에 붕어하고 만다. 일부에서는 동생을 시해한 이유로 광해군을 폭군으로 보기도 하지만 태종 임금을 비롯해 이복 형제나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거나 지켜낸 임금이 어디 한둘인가?
이제 영조 임금의 경우를 살펴보겠다. 영조 임금은 아시다시피 어머니의 출생 신분에 대한 컴플렉스가 대단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도세자는 일찍이 15세 때부터 아버지의 업무를 대리기무 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그러니 자연히 주위의 젊은 세력들이 세자 주위에 모이게 되고 그 와중에 영조가 엄청난 장수를 누리게 되자(재위 52년, 돌아가실 때 춘추 88세) 어서 권력을 잡고 싶은 세자파와 영조 주위의 임금파는 갈등을 겪게 된다. 당시에는 영조의 등극을 찬성하던 노론의 벽파와 영조의 출생을 빌미로 이것을 반대하던 시파간이 알력이 생겨나던 때라 이러한 갈등은 결국 당파와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영조 입장에서 벽파의 도움이 없었다면 임금이 되기는 커녕 목숨 부지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영조는 비록 탕평책을 추진하긴 했지만 자신의 등극에 도움을 준 노론의 세력을 지지기반으로 한 반면 사도세자 주위에는 노론의 시파 세력들이 모여들었으므로 세자의 이러한 행태가 벽파들 눈에는 영조 즉위에 절대적으로 공헌한 자신들에 대한 배반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특히 세자의 장인인 시파의 홍봉한이 영의정에 이르자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벽파 세력은 우의정 윤동도의 지휘아래 세자 제거에 나서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전후 사정을 고려해 볼 때 사도세자의 비극은 잘잘못을 떠나서 피를 나눈 형제나 부모자식 사이에도 나눠가질 수 없는 권력의 무상함이 빚어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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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26
  • 저작시기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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