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사 그리고 로마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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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설:
2. 로마공화정의 수립과 발전
3.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까지(기원전 509-265)
4. 평민들의 신분투쟁
5. 포에니 전쟁
6. 사회경제에 끼친 영향:
7.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 133년.
8. 공화정의 위기와 종말
9. 원수정의 수립
10. 로마문화(로마법과 써커스)
11. 기독교의 전파와 승리
12. 로마제국의 쇠망

본문내용

두려움에서). 또 이따금 로마군대에의 입대를 거부. Nero(54-68) 이래로(데키우스帝 때 최초의 전면적인 박해: 250년) 최후의 대규모 탄압은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그러나 Constantinus. 주교 eusebius가 전하는 Cons.의 개종 이야기--밀비아 다리의 결전을 위해 줄정했을 때 굼을 꾸었는데, 그 꿈에서 기는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가 그려진 군기를 앞세우고 병사를 전투에 내본라는 말을 들음-- 대승리.
313년에 Cons.는 동부의 공동황제인 Licinius와 함께 기독교를 포함한 제국의 모든 종교에 대한 관용을 선언하는 법령을 반포. Gratian(375-383) 때 이교신전의 재산을 몰수. Theodosius I(379-395)는 법률로 옛 로마종교의 숭배를 금지시킴.
국교로서 기독교는 제국 정부로부터 큰 특권을 받음. 재산을 증여받을 수 있는 권리--영속적인 교회기구의 유지를 위해 극히 중요한 특권-- 부여. 사제는 면세. 교인이 관련된 모든 민사상의 소송에서 주교가 재판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 법에 의해 공식적으로 허용됨. 또 이전에 중요한 신전이 향유하고 있던 죄인비호권(right of sanctuary)까지 지님. 요컨대 교회는 어느정도의 통치권까지 지닌 특권적인 기구가 됨.
Cons.개종후 교회의 행정단위는 특히 작은 규모의 단위로 내려갈수록 제국의 민사행정단위와 거의 일치. 주교구(bishopric)는 대개 civitas와 일치. 4세기에 각 속주의 주교구들 통합관장하는 대주교(archbishop) 등장--대주교구는 대체로 속주와 일치. 이따금 한 관구에 1명의 총주교(metropolitan)에 복속된 경우도 있었으나, 제국의 관료조직에 비견될만한 교회전체에 대한 중앙집중적인 행정조직은 없었다. 하지만 4개 대도시: 로마,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의 주교들은 다른 주교들보다 더큰 권위와 특권 누림. 4세기에 콘스탄티노플도 이에 합류. 그 중에서도 로마는 베드로에 의해 건립되었다하여, 또 제국 수도로서 가장 높은 지위 요구.
그러나 새로운 문제. 4세기 이래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라는 문제. "황제의 것"에 어떤 한계를 지우기 어려움. 바로 이때 기본적 신앙문제로 인한 교회 분열 때문에 갑자기 한꺼번에 노출.
Arianism: Arius에 다르면 聖子, 곧 logos는 태초로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영원불멸한 존재인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근본적인 문제. 크리스트가 진정한 하나님인가 여부.
그 때까지 주교회의는 지역적인 차원. Cons.는 교회정부의 새로운 제도인 公會議(general council)을 처음으로 설립. 최초의 Nicea 공회의가 325년에 개최되어 Arius 교리를 비난하고 성자가 '성부와 동일본질임'을 선언하는 교리를 올바른 교리로 확정. Arius파는 잠시 주춤했으나 다시금 세력 부식. 최대적부 Athanasius는 갈리아로 추방. 일부 서방 주교들이 황제의 아리우스파 지지를 거역.
이 문제는 마침내 Theodosius I(379-395) 때 결말.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의-- 니케아 공회의의 결정을 재확인. 이 논쟁의 과정에서 교회와 국가가 관할하는 영역을 구별해야 한다는 원칙이 강력하게 제기됨.-- 장차 서양사회에 큰 영향. 또 동부에 있어서는 분쟁이 결국 황제의 뜻에 따라 마무리 되었다는 것.
12. 로마제국의 쇠망
2세기 말부터 쇠망, 180년 Marcus Aurelius→Commodus*(*gladiator) 세습, 암살. 속주 군대들 황제 옹립 내란. 한 속주의 군사령관인 Severus(193-211)가 승리. 군대가 임의로 정치 개입, 노골적인 군사독재. 내란. 235-284년까지 50여년간 26명의 군인 황제들. 단 1명만 제외하고 폭력에 의해 죽음, 제국 황폐화. 설상가상으로 Germans와 Persians 침입.
) 410년 서고트족의 로마약탈. 로마인들은 큰 충격. 로마제국이 없는 세계를 상상 못함. 로마제국이 멸망한다면 세계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 기독교인들은 313년이래 로마는 하느님이 선택한 지상의 제국이라고 믿음. 로마가 위기에 처하자 이교측과 기독교측간의 논쟁.
멸망의 원인론: 내부적 원인론과 외부적 원인론.
* 납중독- 대부분 토관
* 음란, 탐욕- 이에 대한 증거는 대부분 원수정 초기에 작성된 것, 도덕성은 금욕적 종교들의 영향으로 한층 더 엄격해짐
* 게르만의 침입- 그 이전에 이미 약화
그 원인- 쇠망의 전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단일한 원인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 - 내부에 뿌리박혀 있었던 수많은 원인들이 여하히 결합하여...
로마문명의 모든 측면에는, 힘의 원천이 아니라 장차 쇠망의 원인이 될 요소가 내재되어 있음.
1 군사적 요인- 2세기부터 로마인 병사 징집 곤란, 충성의 문제, 속주들 군사적으로 자립.
2 경제적 요인- 속주들이 자급함에 따라 시장 위축, 교역활동 침체, 경제 침체, 게다가 3세기에 노동력 부족(흑사병, 전쟁)과 통화위기, 또 노예제와 관련하여 기술적인 침체. 노예공급 부족. 노동력 감소를 벌충할만한 기술의 진보 없음.
3 정치구조상의 결함- 권력의 순조로운 계승을 위한 제도적 장치 없음. 지명→세습. 193-211년 아프리카 속주 출신의 군인인 Septimius Severus는 전제적 군인정치 실시. "군인을 돌보아라, 그 나머지는 경멸하라"고 냉소적인 발언을 했다고 함. 궁극적으로 많은 인민을 정치에 참여시키지 못함←과거 시민의식을 대체할만한 충성이 없음, 충성을 확보하는데 실패.
정당성이 없는 힘은 여하한 또다른 힘에 의해 제압될 수 있음- 악순환. 변방수비의 약화 - Rhineland 방면의 Frank 족*(*스스로 자유인Freie임을 뜻하는 프랑크인(Franke)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됨), Danube 방면의 Goths.
4 재정기반 약화- 국고 고갈- 화폐의 질을 떨어뜨림→파멸적인 물가 상승.
259년 Valerius 황제는 페르시아의 포로. 뒤이은 Galienus 황제는 이탈리아에서만 실권, 그 밖의 지역은 장군들이 장악- 분열. 3세기 중엽 로마제국은 끊임없는 내란과 항구적인 재정파탄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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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9페이지
  • 등록일2004.10.01
  • 저작시기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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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69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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