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배경설화
2. 노래
노래의 바른 이해를 위한 준비
살펴보는 여러 가지 사회적 측면
권력구조내의 갈등 양상과 안민가
경제적 측면에서 본 안민가
오악삼산신의 현신이 뜻하는 것
王喜見忠談師의 경위
결론
2. 노래
노래의 바른 이해를 위한 준비
살펴보는 여러 가지 사회적 측면
권력구조내의 갈등 양상과 안민가
경제적 측면에서 본 안민가
오악삼산신의 현신이 뜻하는 것
王喜見忠談師의 경위
결론
본문내용
기록은 월명사가 승려이되 군선지도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을 우리에게 주고 있으니, 따라서 충담사도 승려요 국선지도 였음이 판명되는 것이며 특히 충담사가 국선지도 였다는 사실을 방증해주는 자료로는 그가 화랑인 기파랑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었다는 점이다.
경덕왕의 생각으로는 국가의 어려운 일을 해결하고 구국의 대방을 찾기 위해서는 설사, 전제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박대한 계층이라 하더라도 그가 극단적인 인물이 아니고 공정한 입장에 서서 직언할 수 있은 사람이라면 긍정적으로 대하고 싶었다고 본다. 말년에 왕은 그만큼 초조했고, 또 심약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때 만난 인물이 충담사이고 그 순간 왕은 월명사 때의 일을 기억에 떠올렸다는 뜻이다.
결론
안민가는 경덕왕 때의 비안민적인 풍토에서 생성된 노래다. 왕의 입장에서 볼 때는 혼란한 시국을 타개하는 데 일조가 되는 가요였고, 충담의 입장에서 보면 군에게는 충간을 신민에게는 제도를 목적으로 한 가요이다. 그러나 이 노래가 현실적 효험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는 당시 신라 사회가 안고 있었던 정치·경제 등의 여러 악요인이 정도 이상으로 심각했기 때문이다.
권력구조적인 측면에서 고찰할 때 경덕왕 때는 왕당파와 반왕당파의 대립 반목의 갈등양상이 첨예화되어 이로 인하여 신라 중대의 왕통을 지속시키려던 왕이 겪어야 했던 정신적인 고뇌는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서 겹쳐서 후대를 이을 세자의 행동거지마저 비정상적인 것이라서 안민가를 얻을 무렵 왕의 심경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왕은 안민의 방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리하여 歸正門樓上에 駕行하여 충담사를 만나 안민가를 얻게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왕은 안민의 대방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리하여 귀정문루상에 가행하여 충담사를 만나 안민가를 얻게 되었다 중담사가 노래한 바는 정녕 군신간의 상하 질서가 문란한 점을 걱정한 나머지 이의 시정을 촉구하기 위해서 제시한 시국 수습책의 하나라고 보인다
서민의 경제생활면에서 볼 때에도 당시 신라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요인이 안민가 사가에 투영되어 있다.
당시의 중요기록을 통해서 볼 때 심한 한발과 재난은 일반 백성들의 식생활을 위협하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이 역시 나라를 통치하는 왕의 입장에서 볼 때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점으로 인식되었고 이런 이유 때문에도 안민가는 필요하였으리라 보인다. 충담사도 이런 현실을 알고 있던 터라 군주에게 진언하는 형식을 빌어 구믐대흘 살손 物生 이 홀머기 다싶려라라고 노래하였다고 생각하는데 필자는 이 구절을 상식적인 경세제민의 뜻으로 해석하지 않았고 위기에 당면한 서민경제의 실상과 연결시켜서 풀이하고자 하였다. '이힝힝 빛리곡 어듸갈뎌 힝디'의 문맥에는 그때 호구를 해결하지 못한 백성들이 신라 경내를 벗어나려 한 움직임이 투영되어 있으며 앞 문맥의 '구믈ㅅ다히 살손 物生'과 연관되어 있다.
경덕왕이 歸正門樓上에 駕行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산문기록에 나타나 있는바 五嶽三神 등의 現身에 있다.
왕이 威儀鮮潔한 대덕을 물리치고 굳이 충담사와 같은 인물을 만나고자 한 이유는 안민가가 나타나기 5년전에 二日 現의 변고를 도솔가를 지어 물리친 월명사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런 인물이라야 나라안의 여러 어려움을 해결한 구국의 대방을 제시할 수 있는 이른바 '榮服僧'에 값하는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治理歌 계통의 노래인 安民歌의 저변에는 忠談師의 民本主義思想이 흐르고 있다.
무릇 문학은 사회를 반영한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향가 작품들이 어떻든 간에 문학작품이라는 것은 이견이 없는바, 그렇다면 이 향가 작품 역시 당시 작가가 살고 있던 정치. 경제. 사회의 상황을 모른 척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문학 작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 당시 사회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올바른 해석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1920 . 30년대에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경향을 띠고 태어난 일련의 소설군을 그 당시 일제 강점기라는 상황과 인간적 생활이 억압되는 사회의 모습을 배제하고 생각한다면, 그들 소설이 가지는 문학사적 의의를 인정하지 못한 채 단지 도식화의 길을 걷고 있는 문학성을 가지지 못한 작품들로 취급할 수 있을 뿐이다. 근래에 거론되었던 민중문학론이니 참여문학론이니 하는 논의들 역시 이러한 관점, 즉 문학은 사회와 단절되어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관념 속에 성립되는 것이다. 문학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언어의 예술'이라고 하듯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의 차원인가. 형이상학적인 예술의 차원에서 현실과는 철저히 유리된 것이 바로 문학인가. 그렇지 않다. 문학이란 것은 우리들의 생활의 모습을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문학은 삶이다.' 따라서 우리 삶의 현실과 동떨어진 작품을 진정한 문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는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인 것이다. 문학이란 우리들의 삶의 모습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 내어 형상화하고 그를 통해서 소외된 계층의 목소리와 사회의 억압되고 어두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런 억압되고 어두운 모순들을 사람들이 모여 함께 헤쳐나가고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문학인 것이다. 이상의 논의는 서사 장르의 관점에 치우친 경향이 없지는 않으나 시가 장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 할 수 있다. 시가 장르가 이끌어내는 것은 대부분이 서정적인 심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서정적인 심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바로 자신이 처한 현실의 모습에서, 그 현실을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가 장르 역시 작자가 딛고 있던 현실의 모습에서 완전히 유리되어 창작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배경 사회의 모습에 천착하는 나머지 진정한 문학작품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행위는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참고문헌
원용문, [고전문학논해] 백산출판사, 1995.
윤영옥, [신라시가의 연구] 형설출판사, 1988.
최철 . 설성경, [향가의 연구] 정음사, 1984.
박노준, [신라가요의 연구] 二友印刷社, 1983.
최철 [향가의 문학적 연구] 새문사, 1985.
경덕왕의 생각으로는 국가의 어려운 일을 해결하고 구국의 대방을 찾기 위해서는 설사, 전제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박대한 계층이라 하더라도 그가 극단적인 인물이 아니고 공정한 입장에 서서 직언할 수 있은 사람이라면 긍정적으로 대하고 싶었다고 본다. 말년에 왕은 그만큼 초조했고, 또 심약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때 만난 인물이 충담사이고 그 순간 왕은 월명사 때의 일을 기억에 떠올렸다는 뜻이다.
결론
안민가는 경덕왕 때의 비안민적인 풍토에서 생성된 노래다. 왕의 입장에서 볼 때는 혼란한 시국을 타개하는 데 일조가 되는 가요였고, 충담의 입장에서 보면 군에게는 충간을 신민에게는 제도를 목적으로 한 가요이다. 그러나 이 노래가 현실적 효험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는 당시 신라 사회가 안고 있었던 정치·경제 등의 여러 악요인이 정도 이상으로 심각했기 때문이다.
권력구조적인 측면에서 고찰할 때 경덕왕 때는 왕당파와 반왕당파의 대립 반목의 갈등양상이 첨예화되어 이로 인하여 신라 중대의 왕통을 지속시키려던 왕이 겪어야 했던 정신적인 고뇌는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서 겹쳐서 후대를 이을 세자의 행동거지마저 비정상적인 것이라서 안민가를 얻을 무렵 왕의 심경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왕은 안민의 방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리하여 歸正門樓上에 駕行하여 충담사를 만나 안민가를 얻게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왕은 안민의 대방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리하여 귀정문루상에 가행하여 충담사를 만나 안민가를 얻게 되었다 중담사가 노래한 바는 정녕 군신간의 상하 질서가 문란한 점을 걱정한 나머지 이의 시정을 촉구하기 위해서 제시한 시국 수습책의 하나라고 보인다
서민의 경제생활면에서 볼 때에도 당시 신라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요인이 안민가 사가에 투영되어 있다.
당시의 중요기록을 통해서 볼 때 심한 한발과 재난은 일반 백성들의 식생활을 위협하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이 역시 나라를 통치하는 왕의 입장에서 볼 때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점으로 인식되었고 이런 이유 때문에도 안민가는 필요하였으리라 보인다. 충담사도 이런 현실을 알고 있던 터라 군주에게 진언하는 형식을 빌어 구믐대흘 살손 物生 이 홀머기 다싶려라라고 노래하였다고 생각하는데 필자는 이 구절을 상식적인 경세제민의 뜻으로 해석하지 않았고 위기에 당면한 서민경제의 실상과 연결시켜서 풀이하고자 하였다. '이힝힝 빛리곡 어듸갈뎌 힝디'의 문맥에는 그때 호구를 해결하지 못한 백성들이 신라 경내를 벗어나려 한 움직임이 투영되어 있으며 앞 문맥의 '구믈ㅅ다히 살손 物生'과 연관되어 있다.
경덕왕이 歸正門樓上에 駕行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산문기록에 나타나 있는바 五嶽三神 등의 現身에 있다.
왕이 威儀鮮潔한 대덕을 물리치고 굳이 충담사와 같은 인물을 만나고자 한 이유는 안민가가 나타나기 5년전에 二日 現의 변고를 도솔가를 지어 물리친 월명사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런 인물이라야 나라안의 여러 어려움을 해결한 구국의 대방을 제시할 수 있는 이른바 '榮服僧'에 값하는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治理歌 계통의 노래인 安民歌의 저변에는 忠談師의 民本主義思想이 흐르고 있다.
무릇 문학은 사회를 반영한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향가 작품들이 어떻든 간에 문학작품이라는 것은 이견이 없는바, 그렇다면 이 향가 작품 역시 당시 작가가 살고 있던 정치. 경제. 사회의 상황을 모른 척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문학 작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 당시 사회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올바른 해석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1920 . 30년대에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경향을 띠고 태어난 일련의 소설군을 그 당시 일제 강점기라는 상황과 인간적 생활이 억압되는 사회의 모습을 배제하고 생각한다면, 그들 소설이 가지는 문학사적 의의를 인정하지 못한 채 단지 도식화의 길을 걷고 있는 문학성을 가지지 못한 작품들로 취급할 수 있을 뿐이다. 근래에 거론되었던 민중문학론이니 참여문학론이니 하는 논의들 역시 이러한 관점, 즉 문학은 사회와 단절되어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관념 속에 성립되는 것이다. 문학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언어의 예술'이라고 하듯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의 차원인가. 형이상학적인 예술의 차원에서 현실과는 철저히 유리된 것이 바로 문학인가. 그렇지 않다. 문학이란 것은 우리들의 생활의 모습을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문학은 삶이다.' 따라서 우리 삶의 현실과 동떨어진 작품을 진정한 문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는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인 것이다. 문학이란 우리들의 삶의 모습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 내어 형상화하고 그를 통해서 소외된 계층의 목소리와 사회의 억압되고 어두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런 억압되고 어두운 모순들을 사람들이 모여 함께 헤쳐나가고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문학인 것이다. 이상의 논의는 서사 장르의 관점에 치우친 경향이 없지는 않으나 시가 장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 할 수 있다. 시가 장르가 이끌어내는 것은 대부분이 서정적인 심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서정적인 심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바로 자신이 처한 현실의 모습에서, 그 현실을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가 장르 역시 작자가 딛고 있던 현실의 모습에서 완전히 유리되어 창작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배경 사회의 모습에 천착하는 나머지 진정한 문학작품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행위는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참고문헌
원용문, [고전문학논해] 백산출판사, 1995.
윤영옥, [신라시가의 연구] 형설출판사, 1988.
최철 . 설성경, [향가의 연구] 정음사, 1984.
박노준, [신라가요의 연구] 二友印刷社, 1983.
최철 [향가의 문학적 연구] 새문사,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