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요와 생활사 기말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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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중가요와 생활사 기말 레포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은 두 개의 기본정서가 조화돼 이루어진 데에 예외가 없다.
떠나있거나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데 떠나가야 하고 떠나 살아야 하는 이탈애수(離脫哀愁)요 굳이 떠나가려거든 발병이 나라는 둥 이탈에 수반된 저항애수(抵抗哀愁)가 그것이다. 곧 오순도순 살고 싶은 강한 정착 정서와 갖은 외압으로 떠나살지 않을 수 없게 한 데 대한 저항 정서의 복합이 아리랑으로 구현된 것이다.
한데 그 아리랑의 말뿌리에 대한 정설이 없다. 없는 만큼 이설도 많다. 그 유력한 이설을 들추어본다. 중국 동북지방의 제국(帝國)이던 금나라의 ‘금사(金史)’에 보면 거란족이나 여진족들의 향관(鄕貫)을 표시할때 모(某) 산(山) 사람이라 했음으로 미루어 산은 본관이요 바로 고향이었다.
산의 여진말은 아린(阿隣) 또는 아리라다. 한국말이나 여진말 퉁구스말 터키말은 우랄·알타이어족으로 형제말들이며 여진말의 아린은 터키말의 알리 알린 알리라, 퉁구스말의 아리라와 뜻이 같다. 곧 아리랑은 고려시대 이래 한반도에 귀화해 살았던 거란족·여진족이 그들이 떠나 살아야했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망향의 노래였을 것이라는 설이다.
귀화한 이들은 노래와 춤으로 업을 삼았고 이들의 가무풍(歌舞風)이 상류사회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들의 분산 정착촌과 아리랑의 고장이 무관하지 않다는 설도 이를 뒤받침한다. 일본 전통가요인 발놀림 답가(踏歌)의 후렴의 ‘아라레요’도 북방민족들이 한반도에 전수시킨 무당춤이라는 설도 있어 북방 샤머니즘 문화와 아리랑의 고리를 가늠하게 한다.
2. 식민지 시대의 이별 정서와 해방 이후 최근까지의 삶에서 나타나는 이별 정서는 서로 어떤 차이를 지니고 있는가?
1. 서론
한국인에게 1945년 8월15일은 일제의 질곡에서 벗어나 다시 `빛'을 찾은 환희의 날이지만 일본인에게는 제2차 세계대전 패배의 멍에를 쓴 불명예스러운 날로 기억된다. 1945년을 기준으로 이날부터 서로 다른 역사적ㆍ사회적 변곡점을 맞게 된 셈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시대상을 가장 잘 반영하는 문화양식의 하나라는 유행가의 이별정서는 에서 어떻게 변했을까.
2. 본론
1) 식민지 시대의 이별정서
해방 전 식민지 시대의 한국의 유행가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나-가다-울다-아아(감탄사)-오다-못(부정)-눈물-님-밤-사랑' 이러한 내용의 가사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후기 식민지 이후에 들어서면서`나-가다-울다-그(관형사)-사랑-그대-오다-님-없다-아아(감탄사)'등의 단어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는 정서의 변화를 보여준다.
식민지 시대의 이별의 정서는 고향-가슴-마음-청춘' 등도 빈번하게 유행가에서 쓰였는데 `눈물, 고향, 못, 아아, 밤' 등은 징병과 징집으로 이별을 해야 하는 현실의 비참함과 원망, 슬픔, 자포자기의 심정을 대변하는 정서의 이별정서의 가사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는 국권을 빼앗긴 일제 강점의 서러움이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의 슬픔으로 대체된 것을 뜻한다. 식민지 치하에서 궁핍이 피난민의 굶주림과 전후 복구 속에서 빈곤과 굶주림으로 `옷'만 갈아입은 채 한국인의 `한의 정서'는 면면히 이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식민지 시대의 유행가의 주제는 `슬픔ㆍ그리움>자조>원망>찬미>즐거움>괴로움>희망>사랑>염원>외로움' 순으로 나타났는데 슬픔과 그리움이 가장 많은 것은 국권상실의 비극적 상황으로 초래된 시대적 통탄이 한국인의 공감된 정서로 반영됐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해방 5년뒤 찾아온 한국전쟁으로 여전히 슬픔과 한의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 해방이후 이별정서
해방 후에는 `그리움>슬픔>자조>원망>희망ㆍ사랑>괴로움ㆍ찬미>염원>외로움' 순으로 변화했는데 이는 외세에 의한 분단과 이산의 슬픔이 `그리움'으로 표출된 것이다. 해방은 됐지만 일제 강점의 슬픔과 고통이 해소되기는커녕 곧바로 이어진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슬픔의 정서가 누적돼 전기보다 명랑한 분위기의 유행가가 오히려 감소하였다.
3. 결론
결론적으로 식민지 시대의 이별은 국권을 빼앗긴 슬픔 징집되는 슬픔등 나라를 잃음 설움과 관계된 이별의 정서였다. 하지만 해방이후의 이별의 정서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가족과의 이별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3. 식민지 시대의 가요는 오로지 일본의 영향 속에서만 형성된 것이므로 거부하고 소멸시켜야 한다는 극단적 견해를 종종 대하게 된다. 이에 대한 여러분의 견해를 밝혀 보라.
대중가요와 생활사라는 수업을 듣기 전 친일문학에 대한 나의 생각은 매우 부정적 이였다. 앞의 사례처럼 2000곡을 작곡한 작곡가의 경우처럼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친일적 성향의 노래를 불렀다면 이것도 분명 친일이지 않을까? 정도의 차이라고 할지언정 친일은 친일이다 이것이 나의 생각이었으며 우리 대부분이 가지는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 수업을 통해 이것은 분명한 흑백논리였음을 깨 닳게 되었다. 문화는 지속적이며 서서히 변화하고 발전한다. 이것이 문화의 특성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문화는 어느 순간 갑자기 급작스럽게 변화하고 발전된 결과가 아닌 예전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온 결과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 간과하고 있었다.
친일이라는 민감한 단어 속에서 친일문학 친일가요는 한꺼번에 싸잡아 우리의 문화를 한꺼번에 묻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 감정기 그 곳에서 문학과 가요는 일제의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된 도구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정치적 의도로 음악의 선구자들을 매도해선 안 된다. 일제의 강요에 ‘애국가요’나 ‘전시 국민가요’ 등을 작곡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무대에 설 수 없었던 상시 상황을 고려하여 판단하여 한다는 것이다. 강압에 못 이겨 친일음악을 편찬한 사람들을 싸잡아 친일파라 규정하는 것은 그 당시 날마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하고 행사 때마다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던 우리국민의 모두를 친일파라 규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친일음악도 엄밀히 따지만 우리의 문화이다. 그 당시 사람들이 따라 부르고 울고 웃던 우리의 문화인 것이다. 친일가요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친일문학과 가요를 판단할 때 정치적 이유를 매제한 문화로서 예술로서의 가치까지 매장시키는 것은 우리의 문화를 파괴한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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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2.27
  • 저작시기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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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29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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