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여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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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의 여류문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여류문학개관
1)조선 이전
2)조선 시대 여류문학
2. 신분층에 따른 작품세계
1) 사대부
2) 기녀
3) 소실

Ⅲ. 결론

본문내용

다 보인다. 원래 평남 성천에서 이름 높은 기생이었으나, 뒤에 김이양(金履陽)의 소실로 들어갔고 시에 능해 유고집에 ‘운초집(雲楚集)’이 있다. 일흔이 넘은 연천의 소실로 들어간 것은 연천의 뜻보다는 운초의 뜻으로 보인다. “시 읊조림 여인의 일 아니지만 단지 명공께서는 시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오.”라는 시구에 근거하면 이들이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시적교류가 계기가 된 것임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이처럼 스스로 결혼을 선택한 것에서 알 수 있듯 그녀는 그 자신에 대한 자의식이 강했던 여인으로 보인다. 특히 시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컸는데 이는 다음의 <사절정에서(四節亭)>란 시에서 알 수 있다.
四節亭 (사절정) 사절정에서
亭名四絶却然疑 (정명사절각연의) 사절성 그 이름 문득 그런가 아닌가
四節非宜五絶宜 (사절비의오절의) 사절이란 옳지 않아 오절이 옳다네
山風水月相隨處 (산풍수월상수처) 산, 바람, 물, 달, 서로 어울리는 곳에
更有佳人絶世奇 (경유가인절세기) 또한 절세가인 있지 않는가
이 시에서 화자가 사절이라는 이름을 자긴 정자에 시비를 걸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시의 대가들은 그림과 글씨를 잘 써서 삼절의 칭호를 얻는데, 그 정자는 산바람물달이라는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곳이어서 사절정이라 불려진 듯 하다. 운초는 시적 재능이 뛰어난 절대가인 자신이 이 정자에 왔으니 이제는 이름이 반드시 오절정이 되어야 한다고 장난기 어린 시를 지은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의 시에는 자주 어두운 정서가 내비치는데, 이는 아마도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부심과 현재의 삶이 갖는 괴리감 때문일 것이다. 또한 지나간 역사에 대한 회고가 언뜻언뜻 스쳐지나 가는 데, 이는 실제 서북 태생으로 고구려와 고려에 대한 관심과 애정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만월대를 지나며(過滿月臺)’라는 시에서 고려왕저의 흥망에 대해 회고의 정을 피력함과 동시에 해박한 역사지식을 바탕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이 “포은 목은의 충정”뿐이라고 한 것에는 고구려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에 대한 서북민의 의식도 보여주고 있다.
이 외에도 운초는 보탑시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을 남겼는데 이 시는 일자이구(一字二句)로 시작하여 십팔자이구(十八字二句)로 끝나는 장편의 층시(層詩)로 그 형태적 미학이 파격적이다. 그 내용 또한 임을 그리는 피를 토하는 듯한 애절함의 정서가 매우 뛰어나다. 운초는 황진이, 매창과 함께 조선의 3대 시기로 불렸으나 후에 소실이 되었기에 여기서는 소실 작가로 분류했다. 운초는 연천이 세상을 떠난후 동료은 금원죽서등과 함께 모여 시회를 열기도 하며 적극적 시작활동을 한 보기 드문 여성작가이로 사후 필사본만 전해지다 안서 김억의 소장본을 인쇄하여 민병도의 『조선역대여류문집』에 240제, 329수가 실려 있다. Ⅲ. 결 론
지금까지 조선시대 여류문학을 규수, 기생, 소실의 작품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들의 작품경향은 여류답지 않게 호방한 것도 있었고, 이별의 정한을 사무치도록 아름답게 읊는 것도 있었으며, 한편 과거의 역사를 끌어들여 시를 읊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문학사에서 이들의 흐름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지금까지의 글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서술을 빼놓고 있다. 문학사는 어떻게 기술하든 전체의 흐름을 보여주기 때문에 주류에서 조금씩 일탈된 것들은 놓치기가 쉬운데 여류작가들의 작품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문학사에서는 여류작품을 단순히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부진했다는 식으로만 다루었고, 그 중에 눈에 띄는 난설헌, 황진이, 매창 등만을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여인들의 사회적 제약에 따른 활동의 제약으로 인해 문학사에서조차 전체 흐름에서 유리되어 있는 것이 이들의 작품이다. 특히 조선의 여류문학에 대해서는 당시 여성에게 특수했던 사회적 배경을 전제로 한 좀 더 확실한 고증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부족하지만 나름의 문학사적 의의를 정리해보려 한다.
이 글의 맨 처음 말한 것과 같이 조선은 철저한 유교이념의 사회로 여성들의 위치는 한없이 미미했다. 문학역시 그들에겐 누릴 것이 아니라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사회가 통제했다. 그러나 그러한 암울한 시대상황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여성들은 자신들만의 문학의 명맥을 이어갔고 16세기 이후 작가의 이름이 회자되고, 개인 문집까지 편찬되는 등 그 수는 적을지라도 문학의 한쪽방면을 꾸준히 지켜왔다. 이 글에서는 국문문학에 대해 따로 다루지 않았지만 조선시대 여성 문학층은 훈민정음의 창제로 국문문학의 발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하였고, 특히 시조에 있어서 그 표현은 사대부 남성들보다 더 뛰어난 경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조선조의 여류문학은 국문문학을 발전시킨 주체임과 동시에 시대에 좌절하지 않고 개인의 시재를 주체적으로 발전시켜 나갔으며 그 결과, 여성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한문학뿐만 아니라 우리 문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문학 향유층의 확대라는 점과 개인적 서정성의 획득이라는 근대적 문학의 성격에 한걸음 더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특히나 16세기 이후 조선말로 갈수록 유례없이 여류작가들의 등장과 개인문집의 발간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역사적 흐름의 이유도 있지만 그 이전 그의 뛰어난 작품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조선 시대 유교의 남존여비 사상에 따라 사대부가의 여인들조차 교육의 기회를 올바로 부여 받지 못 했던 없었던 그 시기에 역설적으로 우리 고전 여류문학이 그 어느 때보다 찬란히 빛났던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참 고 문 헌】
이응백 外, 『한국국문학 자료 사전』, 한국 사전 연구사, 1994.
김명희 外. 『조선시대 여성문학과 사상』, 이회, 2003.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2, 3』지식산업사, 1994
김달진, 『한국 한시』3, 민음사, 1989.
황재군, 『한국 고전 여류 시문학 연구』, 집문당, 1985.
김원동, 『황진이 시문학 연구』, 경원대, 1991.
이혜순, 『한국 고전 여성작가의 시세계』,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5
정경화, 『조선조 여류 한시의 시세계』, 한국교원대학교 학사학위 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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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1.13
  • 저작시기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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