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경제운동-물산장려운동과 농촌진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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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시대 경제운동-물산장려운동과 농촌진흥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물산장려운동(物産獎勵運動)
1. 물산장려운동의 배경
(1) 경제적 측면의 실력양성론 대두
(2) 1920년대 초반의 경제 상황
2. 물산장려회의 조직과 활동의 전개
(1) 물산장려회의 창립 과정
(2) 중앙부 조직의 성격
(3) 지방 조직의 결성과 성격
(4) 물산장려운동의 전개
3. 물산장려운동의 논리와 사회주의자들의 비판
(1) 산업장려와 애용장려
(2) 토산장려와 생산증식
(3) 사회주의자들의 비판

Ⅲ. 농촌진흥운동(農村振興運動)
1. 농촌진흥운동의 배경
(1) 조선 농촌의 상황
(2) 일본 대내외 상황
2. 농촌진흥운동의 전개 양상 - 총독부 정책을 중심
으로
3. 농촌진흥운동의 중심 사업
(1) 농촌진흥운동 조직의 육성
(2) 농가 자력갱생 계획

Ⅳ. 맺음말

본문내용

포함된다. 만주사변 이후 중공업이 조선에 대거 이식되어 농촌의 청장년들이 도시로 유출됨에 따라 여성 노동력 동원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봉건적 분업관념이 강하게 남아 있어 여성의 농업노동을 꺼리고 제외시키는 것이 일반이었다. 그러자 총독부는 부인의 사회적 지위의 개선 향상, 부인의 야외활동 권장, 가족제도의 미풍 고조, 현모양처로서의 부인교육 강화, 부인의 교양시설 조장 등의 슬로건을 내세워 여성의 노동을 유도했다. 뿐만 아니라 교육의 혜택을 받고 있던 소년, 소녀들조차도 교육의 실제화라는 이름으로 농업노동에 동원되어 소년, 소녀단을 조직해서 농촌진흥운동에 동원한 사례는 허다했다.
총독부가 지도한 또 하나의 갱생정책은 소비절약과 생활개선이었다. 전가노동을 통해 가계수입을 극대화하는 반면 소비절약을 통해 지출을 극소화하여 가계수지의 균형을 맞추고 나아가 고질적인 부채를 청산하고 ‘비황저축’으로 흉년에 대비케 하여 농가의 안정을 기하고자 함이었다. 당시 농민들의 부채는 상당한 부분이 생산적 부채였으며 비생산적 부채라 하더라도 그것은 식량을 비롯한 기본 필수품에 관련된 것이어서 낭비라고는 없었다. 그러므로 극도로 가나나한 농민들의 소비절약은 관혼상제비 절약, 절주 절연, 고무신 폐지, 흰 옷 폐지, 간식 폐지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항목들에 대한 소비절약운동은 시가행진, 전단 살포 등의 선전공작과 벌금제 등 강압정책을 구사하는 길 밖에 없었다.
일제의 직접적 개입 외에도 마을 진흥회에서 벌금제를 통해 관혼비 절약, 절주 절연, 흰옷 입기, 짚신 신기 등 소위 소비절약 내지 생활개선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생활개선운동의 내용은 신사참배, 조선제사, 황국 신민의 서사 낭독, 국기 존중 게양, 가계부 기록, 분에 맞는 생활, 폐품이용, 대용품 사용, 현금수지 균형 맞추기, 국산품 애용, 절주 절연, 색옷 입기, 온돌아궁이 개선, 관혼상제비 절약, 위생 풍기 개선, 미신타파, 변소개선, 탁아소 경영, 시장형 개선, 공동출하, 공동판매 및 구매 등 관습개선, 전통적 의례의 간소화로 종합될 수 있다. 결국 자력갱생운동을 주축으로 한 농촌진흥운동은 남녀노소를 불문한 노동과 부업으로 수입을 늘리고 생활개선을 통한 극한적 절용으로써 빚을 갚고 춘궁을 모면할 것을 독려한 것이었다.
Ⅳ. 맺음말
이상으로 물산장려운동과 농촌진흥운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물산장려운동이 가지는 한계점은 앞서 알아본 사회주의자들 간의 논쟁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다양한 세력들이 참여한 운동인 만큼, 운동은 나름의 의의를 가지고 있었고 참여 세력의 논리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문제의 해결 방법을 무엇으로 삼느냐에 따라 정당화될 여지 또한 있다 하겠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물산장려운동이 가지는 한계점은 그것이 일화배척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뚜렷하다. 비교적 사회주의자들의 동의를 얻고 있었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토산장려’ 논리도 일화배척운동까지는 발전하지 못한다.
농촌진흥운동은 1932~1935년간의 초기 단계를 거쳐 1935~193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확대되어 실시된다. 이후 1937~1940년 동안에는 조선과 일본이 전시체제에 돌입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성격으로 진행된다. 일제가 제시한 진흥운동은 전체적으로 생활개선과 노동력 혹사에 집중되었지만 조선농지령과 함께 일정 정도 농민 경제에 일조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전시체제라는 특성이 있긴 하였지만, 이 시기의 적색농조운동이 약화된 데는 일제의 농촌 통제 정책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농민의 진흥운동 참여가 비자발적으로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기존의 생활방식을 고려하지 않은 생활개선운동으로 진흥운동은 농민들의 많은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물산장려운동과 농촌진흥운동은 운동의 주체가 누구든 간에 일제 식민지 조건 아래 궁핍한 경제 상황 속에서 도출된 경제운동이었으며, 식민지라는 구조적 모순의 타개라는 궁극적 해결에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데서 공통된 한계를 지닌다. 한편 1920~30년대의 두 경제운동을 통해 일제하 조선 경제의 실상과 운동 주체들이 일제에 어떻게 포섭되어 갔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본고에서 1930년대의 물산장려운동을 다루지 못함에 따라 이 둘을 좀 더 유기적으로 연관시키지 못한 점이나 조선농지령과 관련하여 실제로 농촌진흥운동이 촌락에 미쳤던 영향력이나 농촌진흥회의 역할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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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2.10
  • 저작시기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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