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인 그리고 중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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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 중국인 그리고 중국문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회화 - 텍스트와 이미지의 조화

시화의 통합 시스템 - 시간과 공간의 조화

서 예

중국 예술의 미학적 특징

시화통합시스템 추가설명자료

명나라 참고자료

본문내용

로 《중강첩장도(重江疊圖)》 《사마도권(飼馬圖卷)》 등이, 글씨 유품으로는 《여중봉명본척독(與中峰明本尺牘)》 등이 있다. 그림은 오진(吳鎭) 황공망(黃公望) 왕몽(王蒙)과 더불어 원대의 4대가로 손꼽힌다.
문동: 중국 북송의 문인이자 화가. 자 여가(與可). 호 금강도인(錦江道人) 소소선생(笑笑先生). 쓰촨성[四川省] 쯔저우[梓州] 융타이[永泰] 출생. 석실선생(石室先生)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1049년 우수한 성적으로 진사에 급제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고 사봉원외랑(司封員外郞) 비각교리(秘閣校理)를 거쳐 능주(陵州) 진주(陳州) 등지의 태수를 지내고 1078년 호주(湖州)태수가 되어 다음해 부임하던 도중에 죽었다. 세인이 문호주(文湖州)라고 부르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시문과 글씨, 죽화(竹畵)에 뛰어났으며, 사마광(司馬光), 소동파(蘇東坡) 등은 문동을 매우 존경하였다. 인품이 조운고결(操韻高潔)하였고, 박학(博學)하여 성경(星經) 지리(地理) 방약(方藥) 음률(音律)에 통달하였으며, 시문 이외에 글씨에도 전(篆) 예(隸) 행(行) 초(草) 비백(飛白)을 잘하였다. 문동의 4절(四絶)이라고 하여 1시(詩), 2초사(楚詞), 3초서(草書), 4화(畵)라고 하는데, 그의 묵죽(墨竹)은 소쇄(蕭灑)의 자태가 풍부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담묵(淡墨)으로 휘갈겨 그린 고목(枯木)그림은 풍지간중(風旨簡重)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후세에 묵죽(墨竹)의 개조(開祖)라고 추앙받았다. 시문집에 《단연집(丹淵集)》(4권)이 있다.
명나라 참고자료
① 오파(吳派)
북종화계(北宗畵系)의 절파(浙派)에 대하여, 원말(元末)의 사대가(四大家:黃公望 倪瓚 王蒙 吳鎭)나 조자앙(趙子昻)의 화풍을 답습한 남종화계(南宗畵系) 화가들을 말한다. 오군(吳郡) 출신자가 많아 오파라 하기도 하나 본래는 작풍(作風)상의 호칭이다. 정덕가청(正德嘉淸)경(16세기 전반) 심주(沈周) 문징명(文徵明) 등이 그 기초를 닦았으며, 명말(明末)(16세기말~17세기 전반)에 동기창(董其昌) 진계유(陳繼儒) 등이 나타나 대성하였다. 절파가 강하고 예리한 필법에 중점을 두고, 화원(畵院)의 세교파(細巧派)가 기교를 중히 한 데 대하여 오파는 정신적인 깊이와 아윤(雅潤)한 필법을 중히 여겼다. 화가 중에는 시서(詩書)도 잘하는 문인과 관인(官人)이 많아서 동기창의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남종화를 숭상하고 북종화계인 절파를 천시함) 등과 같은 화론(畵論)도 저술되었다. 작품은 심주의 산수화 두루마리나 동기창의 산수서화책(山水書畵冊) 같은 산수화에 특징이 있으며, 절파를 압도하여 청대(淸代)의 화파에도 영향을 미쳤다
② 절파(浙派)
회화(주로 산수화)는 거의 절파와 오파(吳派)의 두 파로 대별된다. 절파의 절(浙)은 저장[浙江], 오파의 오는 장쑤성[江蘇省] 우셴[吳縣]을 지칭한 것이며, 오파의 시조 심주(沈周)와 그의 계승자 문징명(文徵明)이 우셴 출신인 데 대하여, 절파의 시조 대진(戴進:戴文進)은 저장성 첸탕[錢塘] 출신이었으므로 이 이름이 붙은 것이다. 대진의 뒤를 이은 절파화가로는 오위(吳偉) 장노(張路) 장숭(蔣嵩) 정전선(鄭顚仙) 등이 있으며, 남영(藍瑛)에 미치고 있다. 시대로는 선종(宣宗)의 선덕연중(宣德年中)부터 명대(明代) 말기에 이르나, 최성기는 선덕에서 홍치연간(弘治年問)이며 그 이후는 오파의 남종화(南宗畵)와 교체되었다. 그 양식은 남송원체계(南宋院體系)의 산수화풍에 조방한 수묵화풍(水墨畵風)을 혼합한 것으로 절파양식은 대진이 화원(畵院)에 들어감과 동시에 화원회화의 주요양식이 되었다. 대진과 동시대의 이재(李在)의 화풍에도 이미 그 감화를 엿볼 수 있으며, 이후 성화화원(成化畵院)의 오위, 홍치화원(弘治畵院)의 여기(呂紀) 임양(林良) 종예(鐘禮) 등에 영향을 미쳤다.
절파에는 직업적 화가가 많았으며 화기(畵技)도 탁월하였다. 필묵은 웅건(雄健)하다고 할 수 있으나 뛰어난 필치의 표현과잉으로 오히려 부산스럽고 딱딱한 작품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의 문인화가들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받은 것도, 장노 등의 화풍이 광태사학(狂態邪學)이라는 비평을 받은 때문이었다. 가정(嘉靖) 이후는 오파의 문인화에 눌리고, 명말(明末)에 시작된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남종화를 숭상하고 북종화계인 절파를 천시함)에 부딪쳐 절파화단의 세력은 급속히 쇠퇴되고 절파의 수령격인 남영마저도 순수한 절파양식이 아닌 남종화까지 받아들였다. 청초(淸初)의 4왕(四王)의 한 사람인 왕휘(王)를 남북 2종(南北二宗)의 합일자(合一者)로 보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③남종화(南宗畵)
남화(南畵)라고도 한다. 북종화(北宗畵)에 대응되는 말이다. 북종화가 화원(畵員)이나 직업적인 전문화가들을 중심으로 경직(硬直)된 선묘를 사용하여 그린 장식적이면서도 공필(工筆)의 그림을 의미하는 데 반하여, 남종화는 대체로 인격이 고매하고 학문이 깊은 사대부(士大夫)가 여기(餘技)로 수묵과 담채(淡彩)를 사용하여 그린 간일(簡逸)하고 온화한 그림이다. 당나라 초기 남북2종설(南北二宗說)은 명나라 때 동기창이 《화지(畵旨)》 《화안(畵眼)》 등 그의 문집 속에서 당대(唐代) 선종(禪宗)에 남 북종이 있음을 주목하고, 회화에서도 남 북종의 구분을 한 데서 비롯된다.
④북종화(北宗畵)
화원(畵員)이나 직업적인 화가들이 그린 그림으로, 진한 채색(彩色)과 꼼꼼한 묘사로 마치 사진처럼 외형 묘사에 주력하여 그린 장식적인 그림을 말한다.
선비 화가들이 주로 그렸던 남종화(南宗畵)와 대(對)가 되는 표현이다.
명대(明代)의 동기창(董其昌)과 막시룡(莫是龍)은 산수화의 화풍을 남종화와 북종화의 둘로 나누었는데, 북종화를 당나라 때의 이사훈(李思訓)과 이소도(李昭道) 부자에서 시작되어 송대(宋代)의 이당(李唐), 유송년(劉松年), 조백구(趙伯駒), 마원(馬遠), 하규(夏奎), 명대의 대진(戴進), 오위(吳偉), 장로(張路) 등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이 용어가 나오게 된 동기창의 분류 기준으로는 신분의 고하가 분류의 기준으로 작용하였던 듯하나, 우리 나라에 유입되어서는 신분상의 구분이기보다는 이들 화가들의 화풍을 본뜬 화풍상의 개념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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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2.21
  • 저작시기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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