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영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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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서론

Ⅱ.중국의 초기 영화
1.초기 영화 활동(1896-1921)
2.1920년대 영화
3.난징의 10년: 1927-1937
4. 전쟁중의 영화: 1937-1945

Ⅲ. 모택동 시대(1942-1978)
1.옌안에서의 활동
2.국가 예술로서의 영화(1949-1956)
3.선전정책에 기여한 영화(1956-1964)
4.문화혁명시기(1964-1978)

Ⅳ.덩샤오핑(鄧小平) 시대의 영화(1978-1996)
1. 재건과 개혁(1978-1984)
2.예술과 상업(1984-1989)
3.천안문 사건과 영화의 대응(1989-1996)

Ⅴ.중국영화의 세대구분
1. 중국 영화의 1차 르네상스-1세대 감독
2. 1940년대의 혁명 스튜디오-2세대 감독들과 전쟁
3. 1950년대 스크린의 붉은 별-3세대 감독의 등장
4.사실주의의 부활- 고련 논쟁과 4세대의 등장
5. 1984년 5세대의 탄생
6. 6세대와 언더그라운드 영화

<참고문헌>

본문내용

부정되고 1930년대 사실주의 정신이 부활했다. 이런 문화 상황을 2차 백화제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화에서 이런 변화를 알린 대표적인 작품은 이제 4세대로 분류되는 펑닝이 1980년에 만든 <괴로운 사랑[苦戀]>이다. <괴로운 사랑>은 문혁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보다는 개인의 묘사를 중시했는데 이 영화를 두고 벌어진 유명한 설전이 ‘고련논쟁’이다. 공산당 책임자는 이 영화가 문혁의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했다며 공격했고 온갖 논란이 있었지만 <괴로운 사랑>이 일방적으로 매도당하지 않았다. 토론이 길어지자 당시 공산당 서기 후야오방[胡耀邦]은 유익한 논쟁이었다며 <괴로운 사랑>의 비판 분위기를 종식시켰다.
5세대 이전의 중국 영화 역사는 사실주의 미학의 험난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30, 40년대의 영화는 사실주의의 1차 르네상스였다. 1950년대는 혁명적 사실주의가 낳은 부분적인 성과는 있으되 정치적인 이상과 교조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사실주의의 역동성을 잃어버린 시기로, 결국 1960년대 중반 문혁이라는 영화의 암흑기를 낳았다. 그리고 문혁 이후부터 5세대가 등장하기 전까지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반은 3세대와 4세대 주도로 사실주의가 부활한 시기라고 하겠다.
5. 1984년 5세대의 탄생
제5세대 감독이 이룬 가장 중요한 혁명적 요소는 멜로드라마적인 분위기를 철저히 전복시켰다는 점이다. 그들은 영화가 지닌 영상적 매력을 강조했다. 최초의 제5세대 영화로 기록되는 장쥔자오[張軍釗]의 <한 사람, 여덟 사람[一個和八個]>을 비롯해서 천카이거[陣凱歌]의 <황토지(黃土地)>, 티엔주앙주앙[田壯壯]의 <수렵장의 규칙[獵場托撒]>, 장이모우[張藝謀]의 <붉은 수수밭[紅高梁]>, 황지엔신[黃建新]의 <흑포사건(黑砲事件)> 등은 모두 색채와 조형적 요소, 사운드, 편집의 운용을 중요시한 작품이다. 이전의 중국영화가 대사와 스토리를 중요시했던 경향을 모두 영화적 언어로 대치한 것이다.
이 시기의 영화는 당시의 정치 현실 때문에 민감한 정치적 주제를 언급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제5세대 영화의 주제는 고대의 환상으로 전환되었고,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의 제한을 벗어났다. 그들은 중국 문화를 보여줌으로써 오랫동안 누적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깊이 파묻어 버릴 수 있었다. 중국인의 민족성, 중국 문화의 전통, 중국의 다양한 민족사회문화에 대한 사색과 고찰이 단순한 시각 언어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제 5세대 감독은 1990년대 들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곤경에 빠졌다. 정치적 이유는 64 천안문 사건의 여파 때문이었고 경제적 이유는 각 영화 제작소의 부채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위기는 창작자 자신의 문제다. 제5세대 감독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들이 보여준 것은 힘찬 기개와 뛰어난 연출력, 화려한 색채였다. 이는 영화계의 오래된 정치 홍보식의 형식적인 면과 통속적인 공식을 말끔하게 씻어 주었다. 그러나 이런 창작 혁명은 감정이 결핍되고 역할의 사변화, 상징, 은유, 난해한 기호의 사용은 더욱 더 공허함만 드러내고 말았다. 뜻있는 영화인들은 그들의 국한된 표현에 실망과 불만을 토로했다. 결국 허위에 찬 지식인의 신분을 포기하고 현실과 삶의 문제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6. 6세대와 언더그라운드 영화
장위엔[張元], 왕샤오수와이[王小師], 우웬광[吳文光] 등을 중심으로 한 제6세대 역시 대부분 베이징 영화학교를 졸업했다. 그들이 졸업하자마자 그들을 기다린 건 64천안문 사건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창작자들은 슬프고 분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으므로 지하 활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검열을 피해 놀라울 정도의 저예산으로 주제면에서나 미학적으로 주류와 완전히 다른 영화를 완성시켰다. 중요한 것은 제6세대 감독이 항상 밀수꾼처럼 외국 영화제에 영화를 보내고 상영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법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했고 그래서 중국정부가 1994년에 블랙리스트를 공포하고 법을 어긴 일곱명의 감독을 영화계에서 영원히 고용 금지 대상으로 정했다. 외국에서 ‘7군자 사건’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에 포함된 일곱 명의 감독은 장위엔, 왕샤오수와이, 하지엔쥔[何建軍], 우웬광 등이었다. 심지어는 제5세대 감독인 티엔주앙주앙까지도 사건에 연루도고 말았다. 동시에 중국 정부는 이 감독들의 작품을 상연한 모든 영화제를 거부했다. 이 사건은 세계 인권 단체의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제6세대 감독의 작품은 항상 제작비가 부족하기 때문에 외면적으로 초라하고 스산하지만 제작비를 자체적으로 마련하기 때문에 창작의 자유는 넓어졌다. 대부분 사회적 금기의 범위를 지속적으로 탐구했다.
제6세대 영화는 전위적이고 언더그라운드적이기 때문에 항상 더욱 사실적인 카메라로 중국 사회를 관찰하곤 한다. 그들은 민중의 마음속의 정서를 정직하게 분석하며, 젊은 대중과도 비교적 가까운 편이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이 국내에서 유통되는 경로는 단지 유통 창구가 있는 협소한 지역에 국한되는데 반해 외국에서의 지명도는 훨씬 넘어선다.
하지엔쥔 감독은 제6세대 중 가장 재기발랄한 인물이다. 그의 <우편 배달부[郵差]>는 사실적이고 날카로운 스타일로 크쥐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정서를 따라잡고 있다. 그는 아직도 당국의 규정에 의해 영화 제작소에서 일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다양한 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영화를 완성시킬 수 없는 상황이다. 그는 장위엔처럼 외국 자본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티엔주앙주앙과 왕샤오수와이는 1년 뒤 해금되었다. 이후 그들은 함께 <월남고랑>을 찍었다. 갖은 어려움 끝에도 이 작품은 검열을 통과할 수 없었다. 그 후에 <월남고랑>은 완전히 다른 판으로 수정되었고, 제목조차 바꾼 후에야 비로소 검열에서 통과되었다.
<참고문헌>
『인디컴의 세계영화 기행 1』, 조재홍, 인디컴, 1996
『인디컴의 세계영화 기행 2』, 이남진, 조재홍, 인디컴, 1997
『중국영화사』, 슈테판 크라머, 도서출판 이산, 2000
『중국영화 이야기』, 임대근, (주)살림출판사, 2004
『차이나 시네마-중국영화 백년의 역사』, 루홍스(陸弘石)슈샤오밍(舒曉鳴), 도서출판 동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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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3.02
  • 저작시기2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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