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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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배구의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배구의 역사

2. 우리나라 배구의 역사

본문내용

물게 만들었다.이렇듯 배구전반에 걸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70년대는 한국 배구 70년사상 가장 화려한 시기였으며, 여자 배구가 구기종 목사상 최초로 올림픽 동메달을 획득한데 이어 남자 배구 역시 서구 장신벽을 뛰어넘어 세계 4위에 올 라서는 등 국민의 환호와 기대속에 전국을 배구열기로 들끓게 했다.
이를 바탕 으로 한국 배구는 기업들의 스포츠 참가가 두드러졌으며, 많은 실업팀의 창단과 대기업등의 스포츠 참여에 기여하였고, 또 하나의 특기할 사항이라면 스포츠 인력의 해외진출하는 등 해외에 우리나라를 알리는 중요한 시기였다
80년대-8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 스포츠계는 변혁의 바람이 불어왔다. 86아시안 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함에 따라 온 나라안이 스포츠 열풍으로 소용돌이쳤다. 정치,사회적으로 직시된 당시, 국민들의 답답증을 풀어주는 유일한 분출구는 마치 스포츠인 것처럼 보였다.
86아시안 게임과 88서울 올림픽 유치를 기점으로 급속히 변화된 국내의 스포츠 환경에 배구계 또한 민감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1979년 이낙선 회장이 퇴진한 이후 박경원, 이상용씨가 잠깐씩 회장직을 이어받다가 80년 10월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을 필두로 경제인이 한국배구를 이끌기 시작한데 이어 83년 8월 한일그룹의 김중원 회장이 제 24대 배구협회장으로 취임해 89년 2월 퇴임하기까지 80년대 한국배구를 주도했다. 특히 84년, 80년대 초반의 스포츠 열기와 스포츠 외부적 영향이 반영된 [백구의대제전]대통령배 배구대회가 출범되면서 이전까지와 다른 새로운 차원의 한국배구를 견인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이때에는 김중원 회장의 취임과 더불어 배구인들의 사기진작과 경기력 향상을 위해 신설팀의 지원을 강화하고 협회 통솔의 효율성과 단합을 위해 산하 4개 단체로 나위어있던 실업, 대학, 중·고, 초등학교 연맹을 통·패합함으로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며 점차 동절기에 적합한 실내 스포츠로 정착해가는 배구의 발전과 붐 조성을 목적으로 농구와 마찬가지로 겨울의 추위를 잊게 할 '대통령배 배구대회'가 84년 창설됨으로서 그동안 계속되온 실업연맹전이 없어지고 성인배구도 반은 프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대통령배 배구대회'가 출범되면서 신인 선수들은 대거 등장하고 실업배구의 판도는 많은 변화가 주어졌다. 70년대를 주름잡던 미도파는 현대와 선경의 출현으로 184연승을 마지막으로 연승가도를 끝내고 이것이 청량제가 되어 불꽃튀는 경쟁을 펼쳐냄으로서 사상 유례없는 관중동원까지 부르게 되었다. 이는 여자배구가 춘추전국시 대로 들어섰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자 배구 또한 83년 현대자동차 써비스와 고려증권이 팀을 창단하면서 6개팀으로 증가, 활성화를 띠기 시작했고, 대학배구도 경기대와 인하대를 위주로 우수 고교 선수들을 진학시켜 탄탄한 실력과 함께 실업 배구를 능가하는 전력을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때의 대학 선수들로는 경기대의 장윤창과 정의탁, 이종경, 인하대의 문용관, 유중탁, 한장석 등이 있다. 이러한 우수한 선수들의 힘입어 81년 제2회 세계 청소년 배구 선수권 대회에서 중국과 브라질, 페루를 연달아 격파하며 2연패라는 구기사상 최고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현대배구-90년대 들어 국내 배구는 새로운 양상을 보이게 된다. 지금까지 여자의 경우 대농과 현대의 양대산맥이었던 체제가 무너지면서 호남정유를 시작으로 한일합섬, 흥국생명 등 신흥세력들이 부상하게 되고 남자팀의 경우도 '공포의 외인구단'이라 불릴만한 상무와 대학세인 한양대, 성균관대 등이 코트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하면서 국내배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열기를 띠게 되었다. 특히 별반 스타가 없는 여자배구보다는 화려한 플레이에 준수한 용모까지 갖춘 남자선수들의 대량 배출은 대통령배는 물론 각종 대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을 보기 위해 경기장에 운집하는 팬들로 인해 복도까지 부족할 지경에 이를 정도로 호황을 누리며 대회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한 세력판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그동안 파워와 조직력을 위주로 했던 플레이가 세계적 기류에 맞춘 힘과 높이의 배구로 전환됨으로써 이에 편승한 신생팀들은 승승장구하는 반면 과거에만 머물러 있던 기존의 강호들은 개인기량이나 팀관록이 뛰어남에도 힘과 높이의 열세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세미프로 출범 외에도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확산,인기를 끄는 추세에 따라 창설된 것이 바로 [한국비치발리볼연맹]이다. 90년 7월 창립기념식에서 초대회장 인 김현우(제우교역대표이사)씨는 '비치발리볼은 배구의 기본을 익힐 수 있는 좋은 운동으로 미국, 이탈리아 등 선진국의 예를 봐서 한국에서도 꼭 붐을 이룰 것이다'라며 의욕에 찬 첫발을 내딛었다. 미국이 세계배구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해변에 줄지어 늘어선 배구코트와 프로화된 비치발리볼이 근간이 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창립 첫 사업으로 7월 31일부터 부산 광안리 해변에서의 첫대회를 표명하였다.
제 1회를 시작으로 매년 행해지고 있는 비치발리볼대회는 겨울스포츠라고 여겨왔던 배구의 이미지와는 또 달리 젊음과 낭만을 상징하는 '환상의 여름스포츠'로 새로운 묘미를 보여주는데 국내에선 남자 2인제, 여자 3인제를 실시하며 규격 및 룰은 6인제 실내배구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어택라인 및 서비스 에어리어가 따로 없고 극심한 체력소모를 감안해 세트당 12점 또는 10점제로 실시하는데 강렬한 태양아래 검게 탄 근육을 드러낸 남자, 또 늘씬한 비키니 차림의 여자 선수들이 짝을 이뤄튀기는 볼의 매력은 큰 눈요기거리도 되지만 선수와 관중과의 거리가 없다는 점에서도 단시일에 인기스포츠 종목으로 부상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다만 문제라면 천혜의 조건을 갖춘 미국이나 남미의 해변과 달리 대회장소가 한정돼 있다는 점이다
국제대회에서는 17세이하로 구성된 여자쥬니어배구팀이 세계12강이 겨루는 세계유스배구선수권대회에서 정상에 오르고 91년에는 남자가 악전고투 끝에 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89년 FIVB총회에서 세계배구붐을 확신시킨다는 취지 아래 거액의 상금을 내걸고 창설된 월드리그는 90년 4월에 시작돼 이탈리아가 초대 챔피언이 되었으며 우리나라는 91년 월드리그부터 참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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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4.12
  • 저작시기2006.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4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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