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뿔소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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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코뿔소 교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차 례
1. 야만적 침공 - 코뿔소의 심장이 펄떡인다
믿음의 야성이 당신 속에서 살아 숨쉬게 하라.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혁명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마음으로 우리 안에서 불타는 열정을 자유롭게 추구하며 전진하라.

2. 야만적 부름 - 코뿔소로 부르셨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야만적이다. 위험이나 치러야 할 대가를 보여 주시면서도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다. 사자의 입이 막히고 죽음의 힘이 꺾이는 야만인의 길로 우리를 부르신다.

3.야만적 무리 - 코뿔소를 길들이지 말라
하나님의 신비하고 기적적인 역사는 어디로 갔는가? 교리와 의식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성령께서 하셨던 일들은 교회 프로그램이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길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분을 향해 열정적으로 미치는 것이다.

4.야만적 반란 - 코뿔소 떼처럼 달리라
코뿔소는 9미터 앞까지밖에는 보지 못한다. 그래서 오히려 겁먹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전속력으로 치달린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교회는 코뿔소 떼가 되어 멈추지 말고 달려야 한다.

본문내용

녀들을 개화된 신자로 기르는 실수를 저지를 때가 많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딤후1:5~9) 바울은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리스도와 하나 될 것과 고난을 당하더라도 위축되지 말라고 권한다. 주의 깊게 보면 문명의 길에 빠져 가는 믿음의 아들에 대한 야만인의 호소를 느낄 수 있다. 디모데에게 진실한 믿음은 있지만 그가 성령 안에서 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바울은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불을 다시 지필 것을 주문한다. 디모데의 문제는 노골적인 죄가 아니라 숨어버린 믿음이었다.
개화된 그리스도인으로 자란 아이들은 외적인 힘인 ‘두려움’ 때문에 옳은 일을 하지만, 야만인으로 자란 아이들은 내적인 힘인 ‘사랑’ 때문에 옳은 일을 한다. 나중에 자녀들이 그리스도를 떠나기로 결심한다면, 그것은 믿음과 위험과 모험의 삶을 떠나 지루하고 단조롭고 평범한 삶을 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게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문명화될수록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고통에 더욱 무관심해지는 것 같다. 문명사회의 비극 중 하나는 아무도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세상에 대한 연민이 없는 공동체에 합류하면 우리도 곧 냉담해지고 만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사람은 군중 속에 있을 때 혼자 있을 때보다 악한 행동을 저지르거나 악에 순응할 확률이 높다. 문명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냉담을 합리화하고 자신이 인간적인 책임에서 벗어나 있다고 둘러댈 수 있다. 그러나 야만적 반란은 그런 책임 회피를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시민은 선과 악의 투쟁 한복판으로 끌려간다. 그리스도께 충성을 맹세한 모든 이는 인류에 대한 책임을 진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와 요한복음 3장에서 거듭남에 대해 이야기 하셨던 그 ‘거듭남’은 육신의 출생과는 엄연히 다른 새로운 출생이다. 인간이 혈과 육으로 태어날 때는 지극히 무력하고 의존적인 신생아지만 성령으로 태어날 때는 상황이 다르다. 성령으로 거듭난 새신자는 영적 신생아가 아니라 능력 있게 움직이는 영적 군사이다. 신병 교육대나 대기실을 거치지 않고 바로 영적 전쟁터에 투입된다.
야만적 반란은 어둠의 권세와 문명이 맺는 협약에 반대하는 봉기다. 야만인들은 사람의 마음을 파괴하고 더럽히는 어둠이 있다는 사실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곧 어둠과 공모하는 일임을 안다. 우리가 태어난 곳은 전쟁 한복판이다. 우리는 전사다.(고후 10:3~5)
당신이 길들여진다면 원수는 당신을 내버려둘 것이다. 원수는 길들여진 종교 활동을 오히려 조장하려 애쓴다. 종교는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떼어놓는 가장 확실한 무기 중 하나다. 우리의 믿음이 세련되게 다듬어질 때 그것은 더 이상 어둠의 나라를 위협하지 못한다. 그러나 야만인들은 정사와 권세가 세운 경계를 무시한다. 그들에게 왕도, 주도, 사명도 하나다. 그들은 지옥문을 부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위험의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우리는 회심한 그 순간, 시간너머 영원 속으로 들어올려진다. 그리스도와 함께 가장 높은 곳에 이른다. 그러나 곧 우리의 사명을 위해 역사 속으로 낙하해 하나님의 지상 부대가 된다. 한때 우리 집이었던 세상에서 우리는 이방인과 외국인으로 살아간다. 한때 우리가 하나님의 적군으로 있던 곳이 이제 우리의 적진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걸맞은 유일무이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원하는 모습이 되려는 노력은 그만두라.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일도 그치라. 문명인들은 옷과 반지로 상대를 판단하지만 야만인들은 마음과 행동으로만 상대를 판단한다. 야만인들은 숨길게 없기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산다. 가식과 거짓이 없으며 벌거벗은 채로 수치심도 잊고 싸우는 사람이다.
또한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한 한 사람의 힘도 좋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이 함께 움직일 때 나타나는 힘은 대단하다. 어둠의 나라가 흔들리고, 포로 된 자가 갇힌 감옥 문이 열리고, 족쇄가 풀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얻는다. 그들은 폭력에는 평화로, 증오에는 사랑으로, 억압에는 섬김으로 싸운다. 그들의 위대함은 공동체 안에서 온전히 풀려난다. 그들이 함께 움직일 때 그들 안에서 하나님이 가장 완벽하게 드러나신다.
코뿔소는 시속 48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다. 다람쥐보다도, 중고 자동차보다도 더 빠른 속도이다. 그런데 코뿔소는 9미터 앞까지 밖에는 보지 못한다. 이렇게 덩치 큰 짐승들이 전방 9미터 너머에는 뭐가 있는지 모른채 무리를 지어 시속 48킬로미터로 달리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크러쉬(코뿔소떼의 명칭, 충돌 또는 ‘쾅’하는 소리라는 뜻)는 일단 뿔로 방향을 정하고 나면 염려 없이 전속력으로 달린다.
우리는 그 이름을 사모해야 한다. 우리는 미래를 아는 척 가장할 필요가 없다. 9미터 앞까지밖에는 못 본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코뿔소의 경우처럼, 걱정해야 할 쪽은 9미터 너머에 있는 것들이다. 9미터 너머에 있는 것들은 알아서 코뿔소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볼 수 없고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느라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아는 것을 가지고 전진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곳은 암흑의 나라 중심부, 너무도 사악한 세상의 한복판이다. 그분은 우리를 불러 인류가 머물기로 선택한 곳, 흑암 속에서 헤매던 사람들이 빛을 갈망하는 곳으로 이끄신다. 우리는 사랑과 소망과 믿음의 무기를 들고 그들의 구출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야만적 방식을 따라 끔찍한 십자가를 지신 분을 따라가기로 결심한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인다면, 이미 일은 시작된 것이다. 당신의 원시성이 갇힌 빗장을 하나님께 맡겨드린다면 그분은 당신 속의 거친 야성적 믿음을 풀어주실 것이다. 그때 비로소 당신은, 자신이 문명에서 벗어나 야만적 방식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코뿔소 떼처럼 달려라!
코뿔소는 9미터 앞까지 밖에는 보지 못한다. 그래서 오히려 겁먹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전속력으로 치달린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교회는 코뿔소 떼가 되어 멈추지 말고 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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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2.28
  • 저작시기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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