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사상가 다산 정약용의 업적과 우리에게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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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정약용의 생애
2. 다산의 불행한 의식과 그의 실학사상의 두가지 이념
3. 정약용의 대표적인 업적
4. 실학의 집대성
1) 철학사상
2) 윤리사상
3) 정치사상
4) 경제사상
5) 사회사상
6) 과학사상
7) 문학사상
5. 정약용의 시
6. 세속주의적 도덕적 실천학과 사회적 실용학
7. 정약용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
1) 실학자로서의 정약용
2) 천주교인으로서의 정약용
3) 문학가로서의 정약용
4) 우리가 모르는 정약용
5) 우리에게 귀감이 될 어록

Ⅲ. 결 론

본문내용

정신을 그대로 배어있는 신비함이 느껴진다. 울창한 나무에 쌓여 신선한 산림의 숨결을 느끼고, 마당에 솟아나는 샘물과 멀리 내려다보이는 강진만을 바라보면 위대했지만 골곡이 많았던 다산의 일생을 한토막 되새김질 하는 기분이 든다. 정다산 유적지는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 뒷산 중턱에 위치하는데, 이곳에서 茶山草堂(다산초당), 東庵(동암), 西庵(서암), 天一閣(천일각), 茶山四景(다산사경) 등의 유적이 있다. .
초당은 원래 茶山(다산), 丁若鏞(정약용)(1762∼1836)의 외가인 귤동마을 입향조 尹就緖(윤취서)(1688∼1723)에 의해 건립된 해남윤씨 山亭(산정)으로 전해지며,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당하여 1808∼1817년까지 10여년간 이곳에 거처하면서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본래의 초당은 초가로 되어 있었으나 1936년에 허물어져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현재의 건물은 1958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가 옛 건물터에 중건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瓦家(와가) 팔작집이다.
東庵(동암)은 초당에서 남동쪽으로 약 35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와가 맞배집이다. 1974년 다산유적복원위원회가 중건하였는데 구 건물은 西庵(서암)과 함께 초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西庵(서암)은 초당의 동쪽 아래편에 있는데 「茶星閣(차성각)」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집이다. 역시 1974년 동암과 함께 중건되었다. 天一閣(천일각)은 동암으로부터 약 30m되는 지점에 있는데, 흑산도로 유배간 둘째형 若銓(약전)이 생각날 때 이 누각에 올라 멀리 남해를 바라보던 곳이라 전한다. 정·측면 1칸의 아담한 누각이다. 정다산 유적지에는 다산선생의 따뜻한 손길이 어린 「茶山四景(다산사경)」이 있다. 초당의 서쪽 언덕 岩石(암석)에 「丁石(정석)」이라고 다산이 친히 刻(각)한 글이 있으며, 초당 바로 앞에는 차를 다렸다는 「靑石(청석)」이란 넓적한 돌이 있다. 초당 뒷편으로는 「藥泉(약천)」이라고 부르는 조그만한 샘이 있으며, 동측으로는 方形(방형) 「蓮池(연지)」가 축조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은 진주목사를 지낸 丁載遠(정재원)(1730∼1792)의 아들로,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특출하여 正祖(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801년(순조 원년) 천주교탄압사건인 신유사옥이 일어나자 西學(서학)에 관련하였다는 혐의로 둘째 형인 若銓(약전)과 함께 각각 유배되었다. 이때 다산은 경북 포항의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19일만에 풀려나는데 곧이어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자 또다시 투옥되었다가 그해 겨울에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유배당할 때의 처음 거처는 東門外(동문외) 酒家(주가)(강진읍 동성리 동문마을로 추정)였으며, 그는 이 주막의 뒷방에 「四宜齊(사의제)」란 이름을 붙이고 유배생활의 외로움을 달랬다. 이곳에서 다산은 주위 사람들의 청으로 1803년(순조 3)에 『兒學編(아학편)』을 완성하여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보살펴 주며 따르던 이 지방의 새로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후 1805년 강진읍의 뒷산 보은산방(현 고성사)으로 거처를 옮긴 다산은 이곳에서 당대의 유명한 승려인 혜장(1772∼1811)과 만나게 되고 이 유교와 불교의 학문적 만남은 후에 다산이 『大芚寺誌(대둔사지)』·『萬德寺詩(만덕사시)』등 불교관계의 저술을 남기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806년(순조 6) 가을 다시 그의 제자인 강진읍 牧里(목리)의 李鶴來(이학래)집으로 옮겨 거처하였다가 1808년 (순조 8) 봄에 해남윤씨들의 적극적인 권유에 의해 茶山草堂(다산초당)으로 옮겨 생활하였다. 茶山(다산)이 이 草堂(초당)에서 유배가 풀릴때까지 머무는 동안 (1808∼1817) 弟子(제자) 講論(강론) 및 본격적인 학문탐구와 저술활동이 시작되었으며 이곳에서 그는 實學(실학)을 集大成(집대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강진은 다산이 지닌 사상체계의 구상과 완성에 커다란 배경이 되었으며 그는 유배생활 중 자신을 보살펴 주고 외로움을 달래주던 이 지방 사람들에게 학문적 소양을 넓혀줌으로써 이 지방의 학풍형성에 큰 기여를 하였다. 茶山(다산)의 대표적 著書(저서)로는 『牧民心書(목민심서)』(1817년)·『經世遺表(경세유표)』(1821년)·『欽欽新書(흠흠신서)』(1822년) 등 500여권에 달한다.
Ⅲ. 결 론
흔히 다산을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얘기한다. 이익에서 유형원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며 탈주자학적 경학체계를 세워 19세기 초 실학파의 철학적 입장을 확립한 다산은 성호학파와 북학파의 주장을 한데 묶어 '실사구시 實事求是'의 용광로 안에 녹였다가 '다산학'이라는 자신만의 독창적 학문을 완성한다. 한쪽은 이익과 유형원의 학풍(經世致用)을 이어받고, 다른 한쪽은 박제가 · 유득공 등 북학파의 인물들과 교유하면서 북학(利用厚生)을 섭취한 다산은 이들의 학문적 성과 위에서 '다산학'이라는 거대한 실학의 봉우리를 만들어 낸다.
썩어가는 국가의 대들보를 새롭게 바꾸고 허물어진 주춧돌을 단단히 개는데 평생을 바친 다산에게 돌아온 것은 18년 동안의 유배라는 혹독한 시련이었다. 모진 고문으로 인한 육신의 고통과 찾아오는 이 없는 유배지의 쓸쓸함을 밤을 새는 저술작업으로 극복한 다산이 가슴속에 붙들고 놓지 않은 말은 "한사람만이라도 이 책의 값어치를 알아 주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는 법, 당시의 어두운 현실은 그를 시기하고 배척하였으나 오늘날 그는 '한국학의 바다'로서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실학이라는 학문 바탕위에 백성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해결해 주려고 했던 민생을 사랑했던 다산, 그의 업적과 사상은 후대에 있어서도 누구나에게 귀감이 될 인물이다.
◈참고자료◈
조선후기 역사의 이해, 정옥자 지음, 일지사 1995년
조선후기의 정치와 사상, 정석종 지음, 한길사 1995년
답사여행의 길잡이 5 전남, 한국 문화유산답사회 엮음, 돌베개
조선후기 학계와 지식인, 유봉학지음, 신구문화사 1998년
역사속의 유배지 답사기,박직욱지음, 보고싶은책 1996년
다산 정약용, 윤동환지음, 다산기념사업회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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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3.09
  • 저작시기20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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