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무용의 발전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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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무용의 발전에 관한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상고 및 고대 부족국가시대
1. 상고시대
2. 부족국가시대

Ⅱ. 삼국시대
1. 고구려의 무용
2. 백재의 무용
3. 신라의 무용

Ⅲ. 고려시대
1. 고려시대의 궁중무용
2. 고려시대의 민속무용

Ⅳ. 조선시대
1. 조선시대의 궁중무용
2. 조선시대의 민속무용
(1) 승무
(2) 강강술래
(3) 남무와 한량무
(4) 무동춤
(5) 장구춤
(6) 농악
(7) 살풀이
(8) 무당춤
(9) 탈춤
(10) 소고무
3. 조선시대의 의식무용
(1) 일무
(2) 작법

Ⅴ. 근대무용(1900 ~ 1960)

Ⅵ. 한국무용의 최근 동향(1960 ~ 현재)

* 참고문헌

본문내용

신화를 배경으로한 무용극 ‘불의 희생’을 비롯해 20편 이상의 작품을 발표하는 활발함을 보였다.
1953년 이화여대 체육과에 무용전공이 설치되어 김천홍과 김보남이 이화여대에서 한국무용을 가르쳤으며 1954년 3월에 정인방은 서울 시공관에서 ‘신로심불로’를 비롯 다수의 소품을 공연하였다. 같은 해 11월 김백봉은 서울 시공관에서 발표회를 가졌는데, 최승희와 활동하던 1047년 평양국립극장에서 첫 발표회 이후 두 번째였다. 여기에 부채춤, 화관무등과 다수의 소품을 무대에 올렸다. 1956년 7월 진수방, 김백봉, 송범, 임성남 등이 한국무용협회를 조직하였고, 1958년에 제1회 전국민속경연대회가 개최되었는데이를 계기로 다양한 민속춤이 발굴되었다. 한국 전쟁 이후 상당 기간 안정되지 못한 채 혼미를 거듭하다가 1959년 4월 무용계가 주요 인물들을 망라한 한국무용협회를 결성하였다.
일제 때의 우리 무용은 이념적으로나 기법상으로도 외래의 것을 수용하여 비판, 소화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광복 이후에도 일제의 식민지 통치의 영향과 서양 문물의 무비판적 수용으로 정체성을 다질 내실을 갖추지 못한 아쉬움이 지적된다.
Ⅵ. 한국무용의 최근 동향(1960 ~ 현재)
무용에서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일깨운 것은 1960년 한국학의 대두와 주체성 찾기 운동이 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난 이후이다. 민족 무용의 전통적 계승자로서 김천흥이 1960년 처용랑이라는 작품으로 서울시 문화상을 받게 되면서 전통 문화를 제도적으로 보호 육성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계기로 무용창작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1961년에 한국무용협회가 사단법인으로 발족되어 조택원이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1962년 2월 국립무용단이 창단되어 발레와 한국무용 전공자가 함께 참여하였다. 발레에 임성남, 송범, 진수방, 주리, 이인범, 한국무용에 김백봉, 김문숙, 권려성, 조용자, 정인방, 강선영, 김진걸, 이월영 등이 참가하였다. 같은 해 3월 첫 공연에서 임성남과 송범이 안무한 ‘백의환상’, ‘영은 살아있다’, ‘쌍곡선’을 공연하였다. 1970년에 이르러 한국무용과 발레가 분리되어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으로 이원화 되었고, 1973년 지금의 장충동의 국립극장으로 자리를 옮겨 무용극 운동의 토착화, 무용음악의 가능성 모색 등을 통해 전통 무용과 창작무용극의 발전에 노력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춘향전, 원효대사, 꿈.꿈.꿈, 젊은 날의 초상, 은하수, 대지의 춤, 하얀 초상, 흙의 울음, 그 하늘 그 북소리, 강강술래, 무천의 아침 등이 있으며 한국적 정서를 표현하는 창작무용극을 발표했다.
1960년대 한국무용계는 창작 무용과 한국의 전통 민속무용을 프로시니엄 무대에 맞춰 재구성한 작품을 주로 공연하였는데, 1970년대 초반까지 신무용과 한국무용은 무대화된 민속무용을 가리키는 뜻에서 거의 동일한 용어로 통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무용계에서 시대상에 따라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한국적 춤 언어의 개발로 한국무용의 현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70년대에 이르면 전통 민속춤을 각색하는 쪽에 더 비중을 두는 현상을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국립 단체의 경우 더욱 두르러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1976년도에 서울시립무용단은 궁중 정재의 보존, 민속무용의 개발 및 창작 무용의 모색을 목표로 내세웠다. 이러한 복합적인 목표 설정 하에서 대부분의 해외 파견 무용단들은 관무, 장구춤, 농악, 강강술래, 무당춤과 같은 전통 민속춤을 무대에 맞게 재구성하여 공연하였다. 이후 다수의 무용가들도 전통 춤에 다시 주목하기 시작하여 창작은 답보 상태에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민속무용의 집대성을 위한 중요한 기회를 제공하여 정병호는 전국의 전통 민속춤을 발굴 정리하는 작업을 수행하였고 하보경, 이동완, 박병천, 김순용, 김석출, 공옥진 등 다수의 지역 무용가들이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1979년도에 국립국악원은 김천흥의 주관 아래 궁중무용을 재정리 복원하였고 이와 때를 같이 해 성경린과 장사훈은 전통 춤의 문헌 정리에 노력하였다.
창작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였다. 1979년에 시작된 대한민국무용제는 창작의 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무용계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무용제를 통한 단체간 교류와 합동공연과 남성 무용수의 발굴을 통해 한국무용의 창작 운동이 되살아났다. 내면으로 침잠하는 깔끔한 춤사위가 돗보인 김매자의 ‘비단길’, 서울시립무용단의 문일지의 무용극 ‘순교자’ 등 초기의 창작 무용작품은 기존의 한국무용 춤사위에 새로운 표현성과 남성적 춤사위를 덧붙이는 경향을 보였다.
실제로, 무용은 대규모의 공연물로서 개인적인 활동이 쉽지 않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시작된 무용인의 증가, 공연장의 증설, 국제 교류의 증가로 90년대부터 한국무용 공연의 양적인 증가가 두드러진다. 공연 발표의 기회나 경로도 다양해져 개인적인 창작여건을 구축하는경우도 눈에 띠게 증가했으며 무용계는 새로운 다변화의 물결 위에서 놓여 있다. 전통의 고수와 새로운 한국무용의 창작이라는 두가지 목표는 여전히 유효하며 더욱 다양하고 세련된 형태로 작품들이 발표되고 있다.
오늘날 전통무용을 이해하고 재평가하는 것은 우리 삶의 양식을 파악하는 작업이다. 전통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평가는 현재 우리들의 삶에 정신적 유대감을 형성하고 내일의 한국무용예술의 발전과 창조에 뿌리를 확인시켜 준다. 한국무용의 당면 과제는 북한의 무용을 포함한 세계의 무용문화와의 비교 분석 및 교류를 통해 우리 무용의 국제적 진출을 시도함과 동시에 세계 속에서 우리 무용의 존재를 명실상부하게 드높이는 일이다.
* 참고문헌
김옥진, 무용의 이해, 한양대학교출판부, 1998년.
김혜정, 한국무용사의 이해, 형설출판사, 2003년.
안제승, 무용학개론, 신원문화사, 1992년.
김말복, 무용의 이해, 예전사, 2000년.
권윤방 외, 무용학개론, 대한미디어, 2003년.
황경숙, 한국무용의 인문학적 이해, 대경북스, 2005년.
장사훈, 한국무용개론, 대광문화사, 1997년.
정소영, 무용의 이해, 충남대학교출판부,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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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3.22
  • 저작시기20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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