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의자왕말기 망국예조담의 설화적 성격과 서술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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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문제제기

2. 삼국사기의 서술체제로 본 사료의 선택과 서술

3. 관련사료의 종합성과 기록화 과정의 주관성

4. 예조현상과 역사상황 및 그 암시성

5. 예조담으로서의 성격과 양상

6. 결 론

본문내용

상의 특징에 따라 자생된 예조담으로 보인다.
) 졸고, 「사비강 '배돛대…' 이야기 연구」, 『백제연구』 31,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2000. 2.
'강가의 마을
) 이 말은 전승 현지에 따라 집이나 마루 등으로 바뀌어 표현되기도 한다.
에서 보아 배돛대가 보이면 마을을 떠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처음에는 이곳 인근 주민들에 대하여 홍수 피해를 경계시키려는 실질적인 교훈담으로 말해진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역사가 흐르면서 예조담으로 신비화되고, 인근 마을에까지 전파되어 나갔다. 그리고 다시 왕흥사가 사비강가에 지어지면서 위 이야기는 자연스레 이 절과 관련되어 이야기되고, 그래서 이야기 가운데 '마을'이 '절'로 바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위 예조담은 본디의 내용과는 좀 달리 '절문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위 예조담의 조건부가 되는 '만약 배돛대가 보이면∼'이라는 일반적인 표현이 더욱 강하게 실현된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무렵에 실제로 홍수가 심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팽배된 전쟁의 위기상황 속에서 위기감에 대한 '同一化'로 하여 예사로운 상황이 한층 심각하게 '주목된' 결과일 수도 있다. 어떤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든, 이것이 당시 백제의 망국 예조담의 유력한 하나의 예로 주목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王興寺가 왕실의 원찰로서 각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데에서 이러한 민감한 관찰과 예조담으로서의 높은 의미부여가 실현되었을 것이고, 그만큼 이는 예조담으로서의 전승력도 높았을 것이다. 절의 '중들 모두가 보았다'고 말하고 있음에서도 이를 짐작하게 한다. 요컨대, 본디 금강 주위의 생태환경에 의하여 자생되어 전승되던 예조담이 새로운 상황 속에서 더욱 깊은 관심, 강화된 표현으로 재발견되고 있다는 점에 위 예조담의 특징과 중요성이 있다고 하겠다.
6. 결 론
이 글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19·20년조에 예조현상 기사가 유난히 많음을 주목, 이는 백제사와 관련한 설화적 이해를 돕는 데 그 나름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착상에서 시도된 것이다. 자료의 이러한 집중적인 기록은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역사 사실의 특수성을 바탕으로 하되 역사 기록자들의 백제 폄하적 역사관이 일정하게 가해진 결과이며, 따라서 이것은 시대 상황의 특수성과 관련한 예조담의 전승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역사사실로서의 예조현상 만이 아닌, 설화로서의 예조담이란 관점에서 접근함으로써 그것의 또 다른 의의를 밝힐 수 있다고 보아 몇 가지 측면에서 이에 대한 이해를 꾀해 보고자 했다. 논의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여 글을 맺기로 한다.
정사로서의 사상성 면에서, 삼국사기는 삼국시대 이래 영향을 미쳐온 천명론적 재이관이 유교사상에 의해 더욱 중요시되던 고려중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앞선 삼국사에서도 이런 사상이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유교적 사상성을 더욱 깊이 지녔던 김부식의 경우 심국사기를 통하여 이런 사상은 더욱 뚜렷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여기에 예조현상이 특별히 많이 수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은 신라 중심적 역사의식 위에서 삼국의 역사를 평가하고 서술하는 태도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백제를 폄하하는 태도가 더욱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며, 이것이 백제멸망기 망국예조담을 더욱 집중적으로 수록하고 비판적으로 서술하게 된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성격을 보여주는 백제멸망 예조사실은 삼국사기 이전에도 여러 경로에 의하여 사료 수집이 이루어졌을 것이며, 삼국사기 단계에서 삼국사 이외에도 최대한 많은 자료가 동원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의자왕 본기의 서술에는 자료배치의 임의성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유교적 사고에 충실한 삼국사기가 천명사상에 따른 좀더 엄격한 역사관을 지니고 있었으며, 의자왕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하여 그런 관점에서의 비판적 역사서술이 보다 강하게 실현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들 예조사실들은 기록 순서에서 볼 때 평이한 것으로부터 특이하고 심각한 것으로 발전해 가며, 이와 병행하여 거기에 담긴 암시적인 의미가 더욱 구체화되고 표면화되는 추세를 보여준다. 이는 이들 기록자의 개입이 있기에 앞서 이들 현상이 당시 정치상황의 자연스런 산물임을 말해준다. 그만큼 이들 예조자료는 변화되어 나가는 현실상황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 그 역사적·정치적 중요성이 있다.
이들 예조현상들은 단순한 예조현상에만 그 의의가 그치는 것이 아니며 예조담으로서의 설화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이들 예조담이 의자왕 말기로 갈수록 양적으로 많아지고 질적으로 농도가 짙어지는 것은 곧 이러한 예조담으로서의 성격변화를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특수적이고 괴변성이 크며 사회성을 띠는 것들일수록 예조담으로서의 구전성을 강하게 지니는 것이며 이들 사례가 후반에 주로 분포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무렵에 이들 예조담이 그만큼 성하게 유행했을 것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烏會寺 馬' 이야기나 '왕흥사와 배돛대' 이야기 같은 경우에서 보듯 이들 예조담들은 내용상 다양한 성격을 보이고 있으며, 이처럼 성격상의 다채성 만큼이나 일정한 구전력과 전승폭을 유지하면서 특정 시대 유언비어성 예조담으로서의 기능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역사기록으로서 굳어있는 자료에 대하여 자료를 담고 있는 기록체재의 해명과 더불어 구비문학의 범위 속에 끌어들여 그것을 특정시기 상민들의 입에서 생동해나간 이야기로서 다루어보자는 것이 근본 취지였다. 하지만 예조사실이 예조담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설화적 성격을 다양한 사례와 깊이 있는 분석을 통해 뒷받침해 보이지 못하고 제한된 대상만을 다루는 데 그친 한계점이 있다. 이는 문제를 보는 필자의 안목이 깊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관점의 다양성을 받쳐줄 만한 다채로운 비교자료를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더 주된 이유로 들 수 있다. 이러한 미비점을 인정하면서도, 예조사실을 예조담으로 읽을 때 사료의 살아있는 실체에 좀더 다가갈 수 있다는 점과 그것의 좋은 사례가 곧 백제말기 예조담이라는 점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는 점에 이 글은 작으나마 의의가 인정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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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3.26
  • 저작시기2007.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00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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