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의 새로운 발견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Ⅰ서론

Ⅱ본론
1. 서양인의 조선발견
2. 조선인의 서양발견
3. 두 갈래의 대청인식
4. 서양의 과학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
1) 자연관
2) 천문역법과 과학
3) 세계지리
4) 수학
5) 의학
5. 실학사상과의 연관 문제
1) 세계관과 우주관의 변화
2) 역사 인식의 변화
3)교육 사상의 변화
6. 서양과의 충돌

Ⅲ결론

ㆍ참고문헌

본문내용

비판하였다.
한역서학서 읽기를 실학사상가들의 현실 인식과 당시 사회 상황 및 사회 경제적인 제관계와 연관 지어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면 실학자들이 현실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만 독서를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새로운 소식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나 문화적 유행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성리학 비판을 위한 방법론상의 몇 가지 이론을 명확하게 하는데 자료를 제공한 효과가 보이지만, 실제로 한역서학서의 내용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세계관을 변환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새로운 언어로 자기를 재확인하도록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서학서가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세계를 설명하는 다른 방식과 바른 이해 태도가 던져 준 문화적 자극의 측면이었고, 그것은 전통사상의 근본을 동요시키는 강한 자극이 아니라 전통사상으로 자기를 돌아보고 여유롭게 대응할 정도의 자극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목차
ㆍ요약
Ⅰ서론
Ⅱ본론
1. 서양인의 조선발견
2. 조선인의 서양발견
3. 두 갈래의 대청인식
4. 서양의 과학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
1) 자연관
2) 천문역법과 과학
3) 세계지리
4) 수학
5) 의학
5. 실학사상과의 연관 문제
1) 세계관과 우주관의 변화
2) 역사 인식의 변화
3)교육 사상의 변화
6. 서양과의 충돌
Ⅲ결론
ㆍ참고문헌
<참고 문헌>
ㆍ박성순, 조선유학과 서양과학의 만남, 고즈원, 2005
ㆍ홍원식 외, 실학사상과 근대성, 예문서원, 1998
ㆍ요약
조선후기 실학이 왜 발전 하였을까? 무엇이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대두 시켰을까? 여러 가지 시대적 상황과 정치 상황을 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조선은 임진ㆍ병자 양란 이후 조선의 사화상황과 지식인들의 새로운 문제의식, 동아시아 국제 정치의 새로운 구도와 중국 사상계의 새로운 조류 등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서양 선교사들이 전한 서양 소식과 학술 사상도 하나의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처음 서양인의 조선 발견은 표류 또는 조선 연해에 해한 탐험이나 여러 경로를 통해서 작성된 지도 등에 의거하여 조선을 인식하였다. 그 후 17세기 서양인들의 수차례 조선 표착과 임진ㆍ병자 양란에 종군하였던 서양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여러 가지 책들을 통해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서양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럼 조선인의 서양 발견은 어떻게 이루어 졌을까? 조선인이 서양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는 통로는 주로 중국에서 간행된 서적, 부경사신의 전문, 서양인의 표착이나 이양선의 출몰, 천주교와 프랑스 선교사들의 잠입 활동 등을 통해서였다. 그 중에서도 조선후기 17-18세기에 걸쳐 조선인의 서양인식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중국(청)에서 수입된 한역서학서 였다. 조선인들은 서양인들이 제작한 한역서학서 및 지도를 통해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질 수 있었고, 서양 여러 나라와 신대륙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은 숭명배청이라는 독특한 사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 사상은 서양 학문을 받아들이는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 북벌론의 중심이었던 송시열은 대청복수론과 대명의리론을 내세워 청과의 무역 및 수교를 반대하였고, 그로인해 청으로부터 수입되던 서양의 여러 가지 기술과 서학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북학론의 수용으로 대청관계가 새롭게 조명되기로 하였다. 이는 18세기 후반 북학사상이 대두된 상황에서 북벌론이나 존주론이 지식인 사회에서 공감대를 잃고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서양 과학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은 자연관에서 종래의 주자학적 자연관을 벗어나 인식의 전환(최한기의 자전공전설, 타원궤도설)을 가져 왔으며, 천문 역법과 과학에서는 시헌력의 수입과 서학의 수용으로 의식이 변화가 생겨났으나 비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대통력이 여전히 사용 되었다. 세계지리의 대한 변화는 조선후기에 전래된 서구식 세계지도로 말미암아 종전의 천원지방설에서 지구구체설로 세계관이 전환되었고, 이와 함께 지리적 화이관을 기초로 한 중화적세계관을 탈피하게 되었으며 또한 수학에서는 서양의 기하학인 기하원본, 의학에서는 정약용에 의해 지도된 종두법만이 유일하게 조선 의학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조선후기 실학사상과의 연관문제를 살펴보면 첫째, 세계관과 우주관의 변화를 가져 오게 되었고, 둘째, 역사인식의 변화 즉, 현실론적 주장으로 중화주의의 절대성이 일소되면서 현실성에 입각한 역사의 이해를 가져오게 되었다. 셋째, 교육사상의 변화는 화이관의 극복에 의한 민족주의적 성향과 경서 위주의 교과목을 탈피하여 실용적인 교과목과 과학기술 관련 교과목을 강조하였다.(이익, 정약용,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마지막으로 조선후기의 지식인들은 천주교 신본자가 된 근기남인 신서파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서기의 우수성과 그 수용을 주장한 반면 서교의 측면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유몽인ㆍ이익ㆍ신후담ㆍ안정복ㆍ이헌경 등이 천주학의 교리 일반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에게 한정해 보아도 일반적인 양태였다. 천주교를 둘러싼 비판의 핵심은 천주의 인격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주로 천주교 서적을 통해 조선에 전래되기 시작한 서교는 대다수 지식인들의 부정적인 인식과 조선 정부의 포교금압정책에도 불구하고 촌리에 사는 일반 백성들에게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결론적으로 한역서학서 읽기를 실학사상가들의 현실 인식과 당시 사회상황 및 사회 경제적인 제관계와 연관 지어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면 실학자들이 현실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만 독서를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새로운 소식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나 문화적 유행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성리학 비판을 위한 방법론상의 몇 가지 이론을 명확하게 하는데 자료를 제공한 효과가 보이지만. 실제로 한역서학서의 내용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세계관을 변환시키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서학서가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세계를 설명하는 다른 방식과 바른 이해 태도가 던져 준 문화적 자극의 측면이었고, 그것은 전통사상의 근본을 동요시키는 강한 자극이 아니라 전통사상으로 자기를 돌아보고 여유롭게 대응할 정도의 자극이었다고 생각한다.

키워드

  • 가격2,000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07.12.05
  • 저작시기2007.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4049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