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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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당대의 시대적 배경

2. 당대미술의 발전

3. 오도현의 도석인물화와 수묵산수화

4. 청록산수화파의 이사훈

5. 수묵산수화파의 왕유

6. 당삼채와 백자, 청자

7. 성당회화의 융성과 중국화

8. 맺음말

본문내용

흰색의 점반을 그리기도 하고, 작은 반에 보상화나 영지운과 비안 하엽을 그렸고 때로는 청담색까지 섞어 썼다. 세계 제국의 면모에 어울리는 화려한 모습이다.
삼채의 눈부신 모습에 대하여 청초한 백유도도 발달하였다. 남의 연화유로 만들었는데 때로는 경화유의 청자와 백자도 만들었다. 당의 중기와 말기에는 이러한 명요의 백자, 청자 뿐 아니라 각지에서도 널리 생산되고 근래에 알려진 것만도 안휘성, 수현 근처의 청자, 강서성, 호남성, 사천성의 청자와 백자, 그리고 광동 부근의 청, 백자 등이 있다. 이들 지방의 자기는 미술적으로 우수하다고는 볼 수 없으나 당대의 고상한 기품을 지니면서 각 지방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그 대량생산과 대중화는 주목할 만하다.
7. 성당회화의 융성과 중국화
당대의 귀족문화가 번영함에 따라 남조풍의 풍속화가 부활하고 외국화에서 새로운 기법이 도입하였다. 축천무후 시절에는 미인화가 부활되고 화조화가 성립되었는데 먹 하나로 그린 묵화가 나타난 것은 주목할 만 하다. 이 북화는 <묵색 하나로 오채를 겸한 효과를 내었다>고 하므로 먹의 농담을 최대한도로 이용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수묵화에의 길이 열리는데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것은 획기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대의 사관의 벽화는 비단 종교적인 장식뿐만 아니라 상설의 전람회 역할도 하였다. 서당시대의 벽화도 역시 동황에서 많이 발견된다. 세속적인 제재의 그림은 투르핀 근처에서 발견되는데 매우 훌륭한 작품이 많다. 이들 유품으로 미루어 볼 때 성당의 특색은 그 전아함에 있다 할 것이다. 산이건 말이건 미인이건 정감을 기울인 그 풍부한 자태는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나타내고 있다.
8. 맺음말
우리가 산수화를 남종화, 북종화로 나눈 이론이나, 왕유를 창시자로 하는 이론은 명 말의 문인 비평가들이 당시의 직업화가나 궁정화가에 대항하여 스스로의 회화 가치를 높이기 위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언급했던 이유는 그것이 근 400년 동안 산수화에 대한 중국인의 사고를 지배해 왔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는 당대에 이러한 두 경향의 회화가 그렇게 엄밀히 구별되어 있지 않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오도현, 이사훈, 왕유의 산수화는 이처럼 중국인의 가슴속에 화단의 거장들로 남아있으며 우리나라의 산수화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다. 이런 당대의 산수화 양식에 대하여 서술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는 우리가 돈황에서 나온 벽화와 幡繪, 그리고 최근에 당의 분묘에서 발견된 그림들에 대하여 계속 공부해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8세기에 세가지 양식이 생김에 따라 당의 회화를 추측하기에 충분하다. 이는 곧 「선묘」, 「몰골」, 「설색」을 말한다. 선묘에 있어서는 고개지와 의덕의 묘에서 발견된 산수화로 거슬러 올라가 그 기원을 찾게 되며 몰골 양식은 돈황의 217호 석굴에서 그 예가 되고 설색 양식은 후대의 주요한 화가들이 그린 수묵산수화의 주류에 들어가 발전되었다.
참고자료
중국 예술사, 담단경, 열화당
중국 회화사, M.Shullivan, 형설출판사
  • 가격1,6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8.01.10
  • 저작시기2008.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46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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