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말기, 친일문학과 친일작가들에 대하여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일제 말기 문인들의 동향
2. 친일문학의 분류 (중일전쟁 이후)
1) 대동아공영권 전쟁동원
2) 내선일체와 황국 신민화
3. 국민문학
1) 시대적 상황
2) 국민문학
(1) 내선일체와 내선결혼
① 내선일체긍정론
- 이광수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 말로>, 정인택 <껍질>
② 내선결혼부정론
- 한설야 <피>, 이효석 <엉겅퀴의 장>
(2) 협력과 비협력
① 김사량의 <천마>와 비협력의 길
② 이석훈의 <고요한 폭풍>과 협력의 길
(3) 여성작가의 친일소설
- 최정희의 <장미의 집>, <야국초>
(4) 오족협화론과 만주개척
- 이기영 <대지의 아들>, 송산실 <한등>, 신서야 <피와 흙> 등
4. 친일작가 소개
1) 정비석
2) 김동환 - 약력, 친일시, 단체활동을 통한 친일
3) 김용제 - 약력, 침략전쟁을 찬양한 시인, ‘고백적 일본문학론’의 궤변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글은 총 31편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정혜경ㆍ이승엽, 「일제하 녹기연맹의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회 발표문, 1998) 이 수치는 '조선어전폐론'으로 유명한 친일파 현영섭(玄永燮)에 이어 두번째로, 당시 그는 주로 문화론ㆍ문예 관련 글을 주로 쓴 것으로 위 연구결과에 나와 있다.
그는 일제하에서 총 3권의 친일시집을 출간했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한 첫 시집 『아세아시집』으로 그는 제1회 국어문예총독상을 수상했는데 그 상금 가운데 300원을 조선군 애국부에 국방헌금으로 기탁해 경성대화숙으로부터 '모범사상전사' 표창을 받기도 했다. 1944년 6월에 그는 세번째 시집 『보도시첩(報道詩帖)』을 출간했는데 이는 그가 1943년 5월 말부터 6월에 걸쳐 보선군 보도반원으로 활동하면서 느낀 소감과 각오를 담은 것이다.
그의 친일문학은 전쟁문학과 함께 내선일체를 강조한 황도 문학으로 대별될 수 있는데 『친일문학론』의 저자 임종국 선생은 「김용제론」에서 그의 작품활동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눈 바 있다. 첫째는 1943년 5월에 간행된 그의 두번째 시집 『서사시어동정(敍事詩御東征)』 『비시향과(非時香菓)』 등 일본의 건국사화(史話) 및 창업을 예찬한 것이며, 둘째는 『아세아시집(亞細亞詩集)』에서 지나사변(중일전쟁)과 대동아전쟁ㆍ대동아공영권을 노래한 경우, 세번째는 일제 말기 전시체제하의 인적ㆍ물적 동원에 조선인들의 적극 동참과 각오를 담은 여러 글들을 들고 있다. 임종국 선생은 그를 "박희도를 도와 이 땅에 내선일체와 황도선양의 실현을 위해 진력한 시인"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각종 친일단체에서도 간부로 활동했다. 1939년 10월에 열린 조선문인협회 결성식 때는 춘원 이광수의 회장 취임사에 이어 답사를 할 정도로 이 단체 결성에 적극 참여했으며 1942년부터는 아예 이 단체의 총무부 상무간사로 근무했다. 또 1943년 4월에 조선문인협회ㆍ국민시가연맹 등 4개 단체가 발전적으로 해산, 조선문인보국회로 재탄생하자 그는 여기서도 상무간사를 맡았는데 이 단체는 해방 당일까지 존속했던 친일 문인단체였다.
그의 친일은 해방 당일까지 계속됐다. 이날 오전 10시경 그는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 자격으로 핵심회원 10여 명과 소위 '산업전사위문단 파견문제'를 논의했으며 이튿날에는 모윤숙과 함께 조선군사령부 주최 이우(李瑀ㆍ영친왕 동생)의 장례식에도 참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b. 「고백적 일본문학론」의 궤변
해방 후 제헌국회에 반민특위가 구성되자 그도 역사의 심판대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1949년 8월 12일에 그는 친일 문학잡지 『국민문학』의 주간을 지낸 최재서(崔載瑞)와 같이 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중도 와해로 그는 일주일 만에 풀려나고 말았다. 한국전쟁 와중에 그는 미군부대 산하 민병유격대 정훈학교 고문을 시작으로 반공투사로 변신했다. 그 후 그는 〈청산무정〉 〈임꺽정전〉 〈김립(金笠)방랑기〉 〈김소월방랑기〉 등 시 몇 편을 남긴 바 있다.
그는 지난 1978년에 발간된 『한국문학』 8월호에 「고백적 친일문학론」이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친일은 독립운동을 위한 '위장'이었다며 심지어 박희도를 중심으로 한 『동양지광』이 항일 지하단체의 본거지였다는 궤변을 늘어놓은 바 있다. 그와 박희도는 1939년까지 이광수와 같이 '민족실리쟁취' 촉진을 위해 합법적 활동에 주력했으나 그후로는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민족무차별'을 주장하며 『동양지광』을 소위 동아연맹 조선지부의 본거지로 삼아 항일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동아연맹은 원래 일본 극우파가 주동이 돼 황도사상을 기반으로 만든 단체다. 또 그가 조선본부의 후견인이라고 거명한 이시하라와 이타가키는 각각 일본군 교토지구사령관, 조선군사령관이다.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일제하 반민족행각은 해방 후 제대로 여과과정을 거치지 않은 탓으로 반성과 사죄는커녕 오히려 역사왜곡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Ⅲ. 결론
이상 친일소설에 대해 살펴보았다. 1940년을 전후한 시기는 우리 문학이 어쩔 수 없는 궁지에 몰린 가장 불우한 수난기였다. 우리 국어인 '조선어' 시간이 학교 교과 과정에서 제거된 뒤 이어 일본어 전용으로 교육하려는 조선어 말살 정책이 강행되게 되었고 일제의 식민지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는 것이 완전히 금지되었으며 작가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발표한 지면이 없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작가 자신이 스스로 절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몇몇 작가들은 일제의 문화정책에 동조하는 친일 행위를 하여 동시대인에게 절망감을 안겨 주기도 했다. 그러한 행위는 일본의 내선일치 정책과 천황의 신민 되기, 여성의 국민화 프로젝트, 오족협화론 그리고 징병, 징용을 통한 천황의 국민 되기 등의 국책 사업 등등의 선전을 위한 문학창작활동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이러한 친일작품에서는 시간이 지나 전쟁이 깊어 갈수록 대동아공영권과 관련된 징병, 징용 등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경향이 높아졌다.
대부분 우리는 친일작품에 대해서 막연히 일본을 찬양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해왔었지만 이런 친일 작품의 연구를 통하여 당시 일본이 달성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에 언급한 것처럼 일본은 크게 4가지 목적을 문학을 통해 달성하려고 하였고 전쟁이 더 치열해 질수록 문학에 있어서도 군국주의적 파시즘적인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 우리는 이러한 과거 친일문학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다시는 우리 문학사에게 이런 오욕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지금까지 수면 아래에 침식되어 있던 친일문학을 연구해야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고찰로써 지금 이시대의 불안정한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있어서도 일본인 그네들의 문학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재일본 및 재만주 친일문학의 논리>, 김재용, 역락, 2004
<친일문학의 내적논리>, 김재용, 역락, 2003
<친일문학론의 인식구조>, 강상희, 한국근대문학회, 2003
<최정희의 친일문학 작품>, 최정희, 실천문학사, 2004
<춘원의 친일문학 연구>, 이경훈, 한국비평문학회, 1994
  • 가격1,800
  • 페이지수17페이지
  • 등록일2008.03.24
  • 저작시기2008.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5708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