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조선의 수장 원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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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원균은 누구인가?
2.
우리는 원균을 어떤 인물로 알고 있는가?

본 론
1.
원균은 졸장인가?
(1) 원균은 겁을 먹고 싸우지도 않고 도망갔다?
(2) 칠천양해전의 패배는 순전히 원균의 탓이다?
(3) 원균은 도망치다가 사망하였다?
(4) 원균은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않았다?
2.
원균은 이순신과 왜 반목 하였는가?
(1) 원균은 일방적으로 이순신을 모함하고 반목하였다?
(2)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하여 내쫓고 통제사가 되었다?

결 론
1.
원균은 왜 역사 속에 패배자로 기록 되었나?
(1) 왜 원균이 악역을 맡게 되었을까?
(2) 왜 이순신이 민족 성웅이 되었는가?
2.
우리는 원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본문내용

한 공식적인 평가는 3번 있었다.
첫째는 선조 시대로서, 이 때의 여론은 전쟁의 승패보다는 전쟁에 적극적 참여자였다. 당시 일본군이 부산과 김해지역을 상륙하여 불과 보름 만에 서울이 함락되자 최일선 방위를 담당한 야전지휘관들이 전투를 회피하였다. 또한 선조가 의주로 파천을 단행할 때 호종했던 신하들마저 도망하였다. 왜군의 침략에 맞서 싸울 장수가 없었다는 여론과 파천으로 약화된 집권력을 만회하기 위해 ‘전쟁의 승패보다는 전쟁에 참여한 것이 우선해야 한다.’는 선조의 여론 조성이 군공 심사과정에 반영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왕만이 신민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선조의 집권계략에 따라 전쟁과정에서 야기된 이순신과 원균의 군공 논쟁이 쟁점화 되었고, 선조는 이를 이용하여 이순신의 격하와 원균의 격상을 고집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승자가 녹훈되어야 한다는 반대여론이 가하게 일어나자 그 타협으로 이순신과 원균이 같은 반열의 공훈자인 선무일등공신이 되었다.
두 번째는 「선조수정실록」의 평가였다. 「선조수정실록」은 2차에 걸친 호란을 겪은 후 간행되었다. 「선조수정실록」의 본래 간행자적은 「선조실록」이 북인을 비호하고 서인과 남인을 비하했다는 역사적 반성에 의한 것이지만, 그 내면에는 호란을 겪으면서 오랑캐에게 국왕이 항복했다는 역사적 치욕을 반성하고 그 치욕을 만회하려는 역사의식이 복합되어 있었다. 이 새로운 역사 환경은 이순신과 원균에 관한 평가에 기준이 되었다. 국치의 회복은 국가 목표였으며 국민 여론의 핵심으로 당파를 초월한 것이었다. 따라서 「선조수정실록」이 서인들에 의해서 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수정실록」은 승자인 이순신을 높이고 패자인 원균을 비하시켜 국치를 만회할 수 있는 인물로 이순신을 영웅화하였다.
세 번째는 「이충무공전서」였다. 「이충무공전서」는 유교양반문화를 지향했던 영정조의 문화 사업의 소산물이었다. 조선 후기의 문예부흥 시기라고 불렸던 이 시기에 정조 자신이 「홍제전서」라는 방대한 저서를 출간했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 연구와 도서 편찬에 큰 업적을 남겼다. 따라서 농민 교화와 법제 질서 확립, 유교 예속의 시행, 역사서의 편찬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충무공 후손의 선행이 계속 보고 되었으며, 이순신의 행적을 후대에 선양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정조는 이순신에 관련된 사료를 수집 정리하여 문집으로 발행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사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충무공의 행적이 무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유현으로서도 손색이 없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이것은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평가가 유학의 관점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
유학의 특징 중에 하나는 선악의 분명한 구분이었다. 선악의 관점에서 이순신의 의로운 행동과 충성(승리)이 높게 평가된 반면, 원균의 부정한 행동(이순신 모함)과 반역(전쟁의 패배)은 비난의 초점이 되었다. 이 관점에서 출판된 「이충무공전서」는 역사서인 동시에 이순신과 원균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이 끝난 후 무려 3년 8개월간의 군공 심사 과정을 거쳐 결정된 선무 1등 공신은 이순신, 권율, 원균 3명이었으며 이순신과 원균은 같은 수군 장수로서 각종 자료와 청문을 거쳐 비록 순위는 다를망정 같은 반열의 1등 공신으로 결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반면 원균은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 되었다. 「李舜臣, 元均의 時代別 輿論推移 評價」 장학근 지음
(2) 왜 이순신이 민족 성웅이 되었는가?
이순신 장군은 독립 전에도 영웅이었다. 그러나 독립이후 우리나라의 반일 감정은 극에 달하였다. 그리고 심심하면 터지는 일본의 망언은 그런 반일감정을 잊혀지면 다시 일어나게 하였다. 그때마다 이순신은 표면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수많은 항일영웅이 있지만 왜 유독 이순신이 떠오를까?
이는 박정희정권의 역할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장기집권을 기도하던 박정희정권은 국민들의 저항과 반발을 통제하기 위하여 국가주의, 국수주의,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전파하였다. 이를 위한 유용한 도구는 교육이었고 국사교육은 그 핵심이었다. 이를 통해 민족의 우수성 주체적 근대화, 반외세, 반공, 박정희 정권 옹호 및 찬양을 이룰려고 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국사교육 강화 정책에 관한 연구」 장영민 지음
이런 의도에서 민족사관이 대두되었고 영웅중심적인 민족사관의 특성상 영웅을 찾아야했다. 이때 박정희가 강조한 인물들이 세종, 김유신, 을지문덕 그리고 이순신이었다. 특히 상무적 영웅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그의 집안 내력이 일차적 이유가 되겠다. 박정희의 선친인 박성빈은 무과에 합격하였고 동학운동에도 참여했던 인물이다. 또한 박정희는 어렸을 때 일본군의 주둔훈련을 보고 군인을 동경하다가 이광수의 ‘이순신’이라는 글을 읽고는 이순신에 빠지게 되었다고 자신의 자서전에 밝히기도 하였다. 그는 「목민심서」와 더불어 「난중일기」를 외우다시피 탐독하였으며 그가 집권한 시기에 매년 충무공 탄생 기념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그리고 그도 군출신이기 때문에 자신과 동일화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민족 창조와 동원된 국민통합」 최연식 지음
이순신이 성웅화되면서 그와 반목관계에 있던 원균은 자연스럽게 악역을 맡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2. 우리는 원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원균은 악인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순신과 같은 민족성웅이라고도 할 수 없다. 원균은 시대의 흐름에 의해 악인으로 인식되고 말았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새로운 역사관이 나옴에 따라 원균에 대한 해석도 다시 이루어 져야할 것이다. 비단 원균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역사 속에는 역사가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또는 잘못 해석되어진 인물들이 많다.
요즘 사극을 보면 그 주인공이 영웅이 주를 이루지만 ‘왕과 나’, ‘이산’ 같은 주변인물을 다루는 사극과 ‘정조암살미스테리 8일’과 같은 역사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룬 사극 또한 만만치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불멸의 이순신에서 윤관을 긍정적으로 그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의 관심의 변화에 따라 원균에 대한 재해석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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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3.28
  • 저작시기20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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