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조선의 농업개발 정책과 식량공급기지로서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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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일제하 조선 농업개발 정책의 역사적 전개과정
1.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단계
(1) 토지조사사업의 목적
(2) 토지조사업의 내용
(3) 토지조사사업의 영향
2. 공업원료와 식량공급기지화 단계
3. 공황기의 조선농업
4. 전시통제체제하의 농업

Ⅲ. 식량공급기지로서의 조선농업의 역할
1. 일제의 조선에 대한 양곡정책의 기조
2. 일제하 조선의 식량생산실적
(1) 미곡의 생산실적
(2) 맥류의 생산실적
(3) 두류의 생산
(4) 잡곡의 생산
3. 일제하 조선농업의 수급상황과 식량공급기지로서의 역할
(1) 일제하 조선의 식량수급 상황
(2) 식량공급기지로서의 역할

Ⅴ. 요약 및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기복을 가지면서 감소추세를 보였다.
<표 6> 朝鮮米의 移出量과 移出率 단위: 千石, %
년 도
생산량
수(이)출량
수이출률
1912
10,865
577
5.3
1915
12,846
1,823
14.2
1920
14,882
3,270
22.0
1922
15,014
3,663
24.4
1925
14,773
5,439
36.8
1927
17,299
7,421
42.9
1930
19,181
8,412
43.9
1932
16,346
8,074
49.4
1935
17,885
9,513
53.2
1937
26,797
10,997
41.0
1938
24,139
6,895
28.6
資料: 朝鮮總督府, 『朝鮮米價要覽』, 1941년, 『朝鮮總督府統計年報』, 각 년도 참고
<표 6>에서 보면 朝鮮米의 生産量에 대해서 移出率이 植民地的 經濟政策이 강화 되어갈 수록 증가하고 있다. 1912년에는 불과 5.3% 정도 이출되던 것이 점점 증가하여 産米增殖計劃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1935년에는 53.2%의 米穀이 일본으로 이출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日帝가 朝鮮을 食糧供給基地化를 목적으로 農業政策을 실시하였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하나의 지표로 볼 수 있다. 1935년 이후에는 서서히 감소하고 있지만 여전히 米穀 移出率은 높은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Ⅴ. 요약 및 결론
이상에서 考察한 바와 같이 日帝가 36년간 조선에 대해서 실시한 농업에 관련된 정책은 은 조선의 발전과는 관계없이 日本政府의 정책적 목표와 日本資本主義의 요구로 실시되었다. 일제는 朝鮮 農民의 意思나 經濟與件, 한반도의 특수한 지리적 환경 등을 고려하지 않고, 무력을 배경으로 하여 日帝 農事當局과 農民團體, 여기에 결탁한 日本人 또는 일부 朝鮮人 地主 등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실시되었다.
이 論文에서 고찰한 내용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은 韓日合邦 이전부터 朝鮮의 土地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韓日合邦後에는 土地調査事業을 실시하였다. 土地調査事業은 近代的인 土地所有權을 확립한다는 당초와는 달리 地主의 권리를 인정하고 小作農의 권리를 배제하는 정책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실제의 耕作者인 小作人들은 地主에게만 권리를 인정하자 사기의 저하와 함께 生産意慾을 상실하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 日帝에 의한 朝鮮의 食糧增産政策은 産米增殖計劃을 통해서 실시되었다. 産米增殖計劃은 장기적인 農業開發인 外延的 方法(水利事業, 開墾, 干拓事業 등과 같은 耕地의 擴張 및 改良事業 보다는 단기적인 內延的인 방법(耕種法의 改善, 施肥의 增加 등 農事 改善)에 의존하여 臨機應變的인 彌縫策에 불과 하였다. 이 정책의 시행으로 생산량의 증가는 있었으나 장기적인 조선의 농업을 보호하는 정책으로 보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셋째, 日帝에 의한 朝鮮의 食糧 移出을 보면, 日帝下의 全期間을 대상으로 할 때 朝鮮의 米穀 생산량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증가한 생산량이 朝鮮人의 生活水準을 향상 시키는 데에는 기여하지 못하였고 저렴한 가격으로 일본에 移出되었다. 그리고 小作農을 비롯한 零細 農家들은 商品化率이 11.6% 아주 낮은 수준에 있었고, 1인당 米穀의 소비량으로 보아도 매우 낮은 수준이다. 따라서 이 계획은 日本資本主義 發展에 日照하는 형식을 최종 목적으로 하는 朝鮮 開發政策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넷째, 日帝下의 全期間 동안 朝鮮에서 移出된 食糧은 주로 米穀과 大豆를 들 수 있는데 이의 비율은 1912년에 5.3%이던 것이 1935년에는 53.2%로 상승하였고, 평균적으로 32.9% 정도로 국내에서 생산하는 穀物의 1/3정도는 일본으로 移出되었다. 日本은 朝鮮에서의 식량을 조달하여 食糧과 原料의 供給地로서(山繭增殖, 南棉北洋政策 등)의 지위를 이용하고 商品市場으로서의 지위도 동시에 누릴 수 있었다.
다섯째, 日本은 中日戰爭이 발발한 1937년 이후에는 전쟁수행을 위해서 조선에서의 産米增殖計劃을 더욱 강화하였으나 전시하의 급박한 상황하에서 농업생산이 증대되지 않자 供出制度를 시행하였다. 이 때 供出은 米穀에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畜産物과 林産物 등으로 확대하여 食糧供給基地로서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상에서와 같이 日帝下 朝鮮의 農業經濟는 日本經濟에 從屬되어 전개되었고, 生産構造의 형성은 日本獨占資本主義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朝鮮經濟의 향상을 위하여 라는 것은 명목상의 구호에 불과하고 실제적으로는 日本資本主義의 필요에 의해서 農業開發정책이 추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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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9.22
  • 저작시기20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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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80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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