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회][감리교회 역사][감리교회 총칙][감리교회 전통][감리교회 독립운동][감리교회 의료사업][기독교]감리교회의 역사, 감리교회의 총칙, 감리교회의 전통, 감리교회의 독립운동, 감리교회의 의료사업 분석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감리교회][감리교회 역사][감리교회 총칙][감리교회 전통][감리교회 독립운동][감리교회 의료사업][기독교]감리교회의 역사, 감리교회의 총칙, 감리교회의 전통, 감리교회의 독립운동, 감리교회의 의료사업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감리교회의 역사
1. 교회의 설립과 조직
1) 미(북)감리교회
2) 남 감리교회
2. 만주와 시베리아 선교

Ⅲ. 감리교회의 총칙
1. 총칙의 배경
2. 연합 신도회 총칙

Ⅳ. 감리교회의 전통

Ⅴ. 감리교회의 독립운동
1. 한말의 비운과 독립운동
1) 나라잃고 신앙부흥
2) 학교교육의 민족각성
2. 선교를 통한 사회적 공헌
3. 기독교와 독립운동
1) 3.1 운동과 교회의 수난
2) 3.1 운동 뒤의 기독교
3) 3.1 운동과 여성 애국운동

Ⅵ. 감리교회의 의료사업

참고문헌

본문내용

친서를 가지고 워싱턴으로 미 국무장관을 방문키로 하였다.
- \"한국사\"를 체험대로 집필.
- 꿈에도 그리던 한국의 해방과 독립의 기쁨을 같이 나누기 위해1949. 8. 83세 노구를 이끌고 내한 했으나 여독으로 서울 청량리위생병원에서 별세한다.
- 그의 소원대로 한국땅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장사 된다.
○ 노보을 선교사 : 한국 민족을 충심으로 사랑한 공헌자 이다.
○ 전 덕기 목사(상동교회) : 청년 학원세워 뜻있는 청년을 육성, 민족운동을 지도하는 \"신민회\"중심으로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2. 선교를 통한 사회적 공헌
한국은 불교, 유교, 사상의 지배로 보수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개성·자유·독립 등의 기본적인 권리가 무시 되여 왔다. 위치로도 강대국에 둘러싸여 사대주의적 사상에 사로 잡혔다. 이때 선교사를 통해 민족적인 서구사상이 들어 왔으나, 천도교로 동학혁명이 일어나 민중에 구심점 사대사상을 물리쳤다. 탐관오리를 배격 했다. 박 영효는 일본에 있는 스크랜톤에게 \"우리의 재래 종교는 지금 기운이 진했습니다. 이 백성이 기독교로 돌아 올수 있게 하는 길이 지금 환히 열려 있습니다.\" 고함초기 선교사는 도착 즉시 근대식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사회관을 세워 서민층과 접촉하면서 전도사업에 힘썼다. 선교활동은 민족각성을 일으켜 이 민족을 긴 잠에서 깨워 주었고, 굶주렸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과학지식과 자주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3. 기독교와 독립운동
3.1운동은 1919. 3.1 고종황제의 일산일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총궐기한 우리민족의 국권 회복을 위해 독립을 절규한 운동이다. 3.1운동은 기독교를 비롯하여 천도교, 불교 등 3종교가 합동하여 일본의 탄압 밑에서 맨 주먹으로 평화적이고,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종교인이 앞장선 독립운동이다.
1) 3.1 운동과 교회의 수난
기독교계 지도자들의 국제정세에 따라 민족자결의 원칙에 입각하여 적당한 시기임을 자각하고 서로 협력하여 배달민족의 자주독립운동을 전개 시켰다.
국내에서 3.1 운동을 비밀리에 계획한 곳은 서울, 평양, 선천이다.
○ 서울 - 손병희, 최 린(천도교), 함태영, 박희도, 이갑성
○ 선천 - 이승훈, 양전백, 유여대(장로교회목사), 이명룡(장로)
○ㅍ 평양 - 신흥식(감리교), 길선주(장로교)
3.1 운동의 근본정신은 기독교 정신에서 표현된 자유, 평등, 독립 사상이다. 1919. 3.1 오후 2시 서울시내 파고다 공원에서 폭발된 시위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에 퍼졌다. 3.1 운동 추진은 국내외에 주동적 역활을 대부분 기독교인이 하였다. 3.1 운동이 일어난 뒤 6개월간은 모든 집회가 금지되었다(주일 낮만 허락). 많은 목사, 전도사, 장로들이 감금 되었다.
2) 3.1 운동 뒤의 기독교
일본정부는 한 정부의 자주독립 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하여, 공포 속에 몰아넣고 그 해 8월에 하세가와 총독을 소환하고 후임에 사이또오를 총독으로 임명하였다.(1919. 9. 2.)
사이또오 총독이 서울역에 도착하여, 일본군에 삼엄한 엄호밑에 마차를 갈아 타려할 때 강 우규(당시65세) 의사가 폭탄을 던졌으나 위기를 모면 하였다.
○ 강 우규 의사(평남 덕천 출신)는 29세, 함흥 홍원으로 이주하여 장로교 신자가 되었다.
사이또오 총독 부임 소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합방(1910)이후 얼마나 총칼을 휘둘러 민족을 학대 했는가를 알 수 있고, 만주로 강제 추방하여 이민케 됨을 자백하였다. 또 문화정책 미명아래 차원 높은 정신적 지배를 위해 \'포섭동화\'에 힘썼다.
- 헌병제도 철폐
- 훈도(교사)들이 찼던 칼을 떼고
- 사회유지와 인사를 포섭
- 조선, 동아 신문의 발행허가
- 기독교의 감시와 조사 위해 학무국장 밑에 종교과를 신설하여\"나가이\" 가 맡았다.
신설된 종교과 직원중 2명은 기독교인 채용, 영어에 능통한 기독교 신자를 촉탁으로 등용, 외국인과의 연락기관으로서 외국인 선교사의 설득공작에 힘썼다.
3.1 운동을 계기로 주한 신교 6선교부 연합회에서 일제의 야만적 정책에 항거하여 사이또오 총독에게 \"선교사 대회 진정서\"를 직접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시바다 학무국장은 변명하고, 시정하지 않았다.
3) 3.1 운동과 여성 애국운동
유 관순은 1919. 3. 25 만주지방에서 혼춘 애국부인회가 조직되여 독립운동을 도모하였다. 혈성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의연금을 모금해 수감 중인 지사의 음식을 제공, 상해 임시 정부에도 원조하였다. 대한 애국부인회를 통해 1919. 6 평양감리교회 중심으로 상해정부 원조목적으로 활동하였다.
Ⅵ. 감리교회의 의료사업
알렌은 1884년 12월에 갑신정변(우정국사건)이 일어나 중상을 입은민영익을 비롯하여 많은 고관들을 치료하여 줌으로써 고종 황제의신임을 얻어 1885년 2월에 한국 최초의 서양 의술의 병원인 광혜원(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을 설립하고 그 책임자가 되었다 (광혜원은후에 제중원으로 개칭하였다). 감리교 최초의 의료 선교사 스크랜톤은 처음에 알렌과 함께 제중원에서 일하다가 1885년 9월에 정동제일병원을 세우고 의료선교에 임하였다. 1887년 감리교의 여자 의료선교사인 메타 하워드(Meta Howard)는 정동의 이화학당 구내에 부인 병원을 설립하였는데 명성황후는 병원의 이름을 보구여관이라고 지어주었다. 그 후 감리교와 장로교는 서울, 인천, 평야, 원산, 공주, 부산, 대구, 선천, 재령, 청주, 강계, 전주, 광주, 해주, 안동, 군산, 목포, 개성, 춘천, 진주, 성진, 함흥 등에 병원을 세우고 의료사업과 동시에 선교사업을 하였다. 세브란스병원은 1904년 9월에 남대문에 현대식 병원을 신축하고의학교와 간호학교를 설립하여 1908년에 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이 한국 최초의 의사들이었다.
참고문헌
· 김홍기, 감리교회사, 도서출판 kmc, 2003
· 안수훈, 한국 감리교회 성장사, 감리교회 출판부, 1981
· 앨리스 맥그래스, 소기천 외 3명 역, 신학의 역사, 지와 사랑, 2001
· 이형철 감리교회 형성사
· 장중열, 감리교회 성장과 선교학, 서울 : 성광문화사, 1990
· 종교개혁사, 지와 사랑, 2004
· 존 웨슬리의 구원론, 성서연구사, 2000

키워드

  • 가격5,0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8.12.08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0239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