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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요

Ⅱ. 세종(세종대왕)의 등극 배경

Ⅲ. 세종(세종대왕)의 북방정책
1. 조선 국경의 전진 배치계획
2. 육진의 개척
3. 사군의 개척

Ⅳ. 세종(세종대왕)의 인재들
1. 정치-황희 맹사성 유관
2. 국방-이종무 최윤덕 김종서
3. 집현재-변계량 이수 윤회
4. 훈민정음-정인지
5. 과학-정초 이순리 장영실
6. 음악-박연

Ⅴ. 세종(세종대왕)조의 발명품
1. 용비어천가
2. 훈민정음
3. 집현전
4. 측우기
5. 혼천의(渾天儀)
6. 해시계
7. 간의
8. 자격루

참고문헌

본문내용

였다.
3. 집현전
고려 이래 조선 초기에 걸쳐 궁중에 설치한 학문 연구기관.
1392년(조선 태조 1) 7월에 제정된 관계에 따르면 고려의 제도를 도습하여 보문각(寶文閣) ·수문전(修文殿) ·집현전(集賢殿)이 그대로 존치되어 있었으나,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집현전을 확대하여 실제의 연구 기관으로 개편하였다(1420). 그 직제는 겸관(兼官)으로 영전사(領殿事:정1품) 2명, 대제학(大提學:정2품) 2명, 제학(提學:종2품) 2명을 두었으나 실제로 직무를 집행한 것은 녹관(祿官)인 전임직이었다. 그 인원은 처음에 10명이었으나 점차 증원되어 36년(세종 18) 20명으로 확정되었다. 세종은 학사들의 연구에 편의를 주기 위하여 많은 전적(典籍)을 구입하거나 인쇄하여 집현전에 보관시키는 한편, 재주 있는 소장 학자에게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특전을 베풀었다. 이로써 수많은 뛰어난 학자들이 집현전을 통하여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임무는 ① 학사 20명 중에서 10명이 경연(經筵)을, 다른 10명은 서연(書筵)을 담당하였고, ② 집현전이 궁중에 있고 학사들이 문필에 능하다는 이유로 그들 중 일부는 사관(史官)의 일을 맡았으며, ③ 사령(辭令)의 제찬(制撰)을 담당하는 한편, ④ 중국 고제(古制)에 대하여 연구하는 일 등이었다. 이곳에서 이룩된 업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創製)이다.
4. 측우기
1441년(세종 23) 8월에 예조(禮曹)가 측우기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다음해 5월에는 측우에 관한 제도를 새로 제정하고 측우기를 만들어 서울과 각 도(道)의 군현(郡縣)에 설치하였다. 원래 측우기가 쓰이기 이전에는 각 지방의 강우량의 분포를 알아내는 데 매우 불편하였다. 즉, 비가 내림으로써 흙속 깊이 몇 치까지 빗물이 스며들었는지를 일일이 조사해 보아야 하는데, 이때 흙에는 마르고 젖음이 같지 않아 강우량을 정확히 알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측우기는 일정기간 동안 그 속에 괸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여 그 곳의 강우량으로 하기로 되어 있다. 측우기는 안지름이 주척(周尺)으로 7치(14.7 cm), 높이 약 1.5척의 원통으로 되어 있는데, 비가 올 때 이 원통을 집밖에 세워 두면 빗물을 받을 수가 있다. 측우기에 괸 물의 깊이는 자[尺]로 측정한다. 즉, 대(臺)를 관상감에 만들어서 측우기를 대 위에 올려놓고 비를 받도록 하는데, 관상감의 관원이 직접 주척으로 물의 깊이를 측정하여 보고한다. 중앙에는 관상감에, 지방에는 각 도의 감영(監營)에 설치하였다. 처음에 철로 만들었으나, 뒤에 구리로 만들어 쓰기도 하였고, 지방에서는 자기(瓷器) ·와기(瓦器) 등을 쓰기도 하였다. 주척은 나무 또는 대나무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조선 세종 때의 측우기가 과학사상 뜻깊은 것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쓰였다는 사실이다. 유럽에서는 1639년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처음으로 측우기로 강우량을 관측하였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1658년부터, 영국에서는 1677년부터 관측하였다. 한국에서는 이미 1442년 5월부터 측우기로 우량을 측정하였으며, 이것은 이탈리아보다도 약 200년이 빠르다. 금영측우기는 1837년(헌종 3)에 만든 것으로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어 기상청에 소장되어 있다.
5. 혼천의(渾天儀)
선기옥형(璇璣玉衡)·혼의(渾儀)·혼의기(渾儀器)라고도 한다. 고대 중국의 우주관이던 혼천설에 기초를 두어 BC 2세기경 중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확실한 자료가 없어 추론에 불과하나, 삼국시대 후기에서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만들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6. 해시계
① 명칭 : 앙부일영 (해시계) 보물제845호
② 소장위치 : 여주군 영릉/ 국립중앙박물관
③ 구조 : 그림자를 받는면이 오목한 것/수평인 것/연직으로 벽면을 이룬 것 등이 있으며 오목한 반구형이 일반형이다. 오석(검은 색깔의 광택이 있는 돌)에 반지름30cm의 반구(半球)를 파고, 그 안에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 24절기를 새겨 수직으로 시각의 선(절후선)을 그렸다. 여기에 북극을 가리키는 바늘(영침)이 꽂혀 있어 햇빛이 바늘에 닿으면 그 그늘이 오목한 부분에 나타나므로 그 위치로써 시각을 헤아렸다. 반구형(半球型)의 대접 모양에 네 발이 달려 있는데,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 24절기를 13선의 계절선(季節線:緯線)으로 나타내고, 이에 수직으로 시각선(時刻線:子午線)을 그었으며, 시표(時標)는 북극을 향해 비스듬히 세워졌다.
④설명 : 세종 19년(1437년)에 정초(鄭招), 장영실(蔣英實) 등의 과학자들이 많은 기술자를 지도하여 만든 것으로, 솥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졌다.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가(南街)에 각각 석대를 쌓아 그 위에 설치하여 한국 최초의 공중시계 역할을 하다가 임진왜란 때 유실되어 없어지고, 23세기후에 만들어진 2개의 앙부일구가 남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7. 간의
세종은 자주적인 역법(曆法)을 편찬하기 위해 역법의 연구와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고자 천체관측을 시작하였다. 세종 14년(1432년)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나무로 간의(簡儀)를 시험 제작하여 한양(서울)의 위도를 측정한 후 청동 간의를 만들었다. 행성과 별의 위치인 적경과 적위의 정밀 측정은 물론 고도와 방위측정, 낮과 밤의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천문관측기기이다.
8. 자격루
때가 되면 인형이 저절로 나와 종을 쳐 시간을 알려 주는 최첨단 물시계. 기록에 의하면 이 자격루는 시계 장치의 움직임이 \'귀신과 같아서\' 보는 이마다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거의 완전하여 사람의 손이 필요치 않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국역, 조선왕조실록, 서울시스템
김재영, 세종대왕의 정치지도력, 호남 정치학회보 9집
김영기, 세종대왕(15세지 한국의 빛), 신구문화사, 1998
심한수, 조선세종대 국상의례 연구, 서울 : 동국대 불교대학원, 2003
세종시대 문화의 현대적 의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박영규,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 들녘, 2002
이재호, 조선정치제도 연구, 일조각,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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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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