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사회변화와 경제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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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조선후기의 사회변화
1. 상속제도와 결혼(가족제도의 변화)
2. 노비제도의 변화
3. 인구증가와 추세
4. 신분제의 변화
5. 평민의식의 성장

Ⅲ. 조선후기의 경제발전
1. 조선후기 사회경제의 발전
2. 상공업의 변화와 발전
3. 도시상업의 발달과 형태

Ⅳ. 상업적 농업의 발달
1. 농촌사회의 변화와 새로운 움직임
2. 농민층분화현상-임노동의 고용
3. 상품작물의 재배와 판매

Ⅴ. 결 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과는 영세빈농층이나 무전무전(無田無佃) 농민층의 배출이었다. 이들은 부농층의 경영확대가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전작지(佃作地) 의 차경(借耕)도 용이하지 않았으며, 그 스스로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와 같이 농촌사회에는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력을 상품화할 수 있는 계층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농민층분화는 임노동계층의 자유롭고 고용주와는 신분상 대등하게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국가사업에서도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추세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관행으로 농업노동에도 임금노동의 형태가 자연스럽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농촌사회에서는 임노동계층이 성립되고 농업경영에서 임노동으로서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부농층은 토지를 집적하든가 또는 소작지를 많이 얻든가 하여 경영확대를 하였으며, 그것을 경영하는 데 있어서 부족한 노동력은 임노동으로 보충하면서 상업적 농업을 행하였다.
3. 상품작물의 재배와 판매
부농으로서 선진적 계층은 상품작물을 재배하여 장시에 내다팔아서 부를 축적해갔다. 상업적 농업의 대상작물은 모든 농산물에 해당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주로 곡류,면포,소채,약쟈,남초 등이 중심이었다.
곡물로서 상품화가 활발하였던 것은 쌀이었다. 쌀은 두 가지 경로로 상품화되었다. 하나는 지주가 소작료로 받은 쌀을 장시에 판매하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농민이 소비하고 남은 쌀을 판매하는 경우였다. 상품화되는 것은 전자가 다수였다.
조선 전기에는 면화를 자가경작하여 면포를 직조하여 옷을 입는 경우가 많았으나, 조선 후기에는 사회적 분업이 발달하면서 농업과 수공업이 분화하게 되었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되면서 면포의 매매가 활발하였다.
면화재배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생산비 중 노동력 구입에 들어가는 비용이 많아 그것을 지불할 수 있는 부농이 주로 면화경작에 참여하였다. 면화를 많이 재배하는 지역은 삼남지방과 황해도에 집중되어있었다.
16세기 말경 우리 나라에 담배가 전래된 이후 소비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에 담배 재배도 증가하여 농민들은 비옥한 토지를 담배 밭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담배의 생산은 대부분 시장판매를 통해 이익을 얻기 위해 경작하였다. 담배재배에는 부농이 다수 참가하였고 재배를 통해 이익을 얻었으며, 아울러 담배판매를 담당하였던 상인도 큰 이익을 얻었다. 18세기 말 유명한 담배산지는 평안도의 성천, 강동, 삼등, 평양 및 전라도의 진안.장수. 전주 등이었다.
농민층분화현상의 진전으로 도시로 인구가 몰려들며서 도시인구가 증가하였다. 대도시 주변에서는 조미료와 소채시장이 확대되었고, 이에 그 작물의 재배도 활발하였다. 농민은 도시 주변의 적은 면적에 소채를 경작하여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도시 주변의 소채재배업은 상품생산적 성격이 강하며,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어서 재배업자들은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조선 후기에 상업적 농업이 가장 발전한 부분은 인삼을 비롯한 약초재배였다. 인삼은 국내 소비뿐만 아니라 국외로의 수출도 중시되어 수요가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많은 자본을 지닌 개성상인들이 삼포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인삼재배업은 기업적인 형태로 발전하였다. 재배기간이 4~6년은 되어야 수확할 수 있었고, 아울러 노동력이 많이 들었으므로 자본을 많이 가진 자들이 참여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상품작물을 재배하는 상업적 농업은 확대되어갔다. 그에 따라 상품작물의 재배와 판매에 따른 이윤의 보장으로 점차 특정작물의 지역분화와 주산지형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품작물의 형성과 발전은 모든 지역에서 또는 모든 농업생산 부문에서 동시에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상품작물의 재배지역에서는 농민들이 주곡작물을 재배하지 않고 특정작물을 재배하여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상품작물재배를 통하여 부를 축적하여 갔다.
물론 그러한 선진적인 상업적 농업을 부농층만이 행한 것은 아니었다. 지주층들도 그러한 면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전호에게 상업적 농업을 권하거나, 심지어 직접 고공을 고용하면서 경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Ⅴ. 결 론
농업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사회적 분업이 진전되면서 조선 전기와 달리 조선 후기에 농업 부문에서의 변화가 심하였다. 즉 소농민이 단순상품생산자로 발전해갔고 농업기술 발달에 따른 노동력의 절감과 수확량의 증가현상은 광작을 촉진시켜 농민층의 분해현상을 유발하였다.이는 토지소유관계에 있어서도 전호와 지주의 관계를 외적 강압이 아니라 경제적인 관계의 성립을 이루었다. 농업경영에 있어서도 토지 집적을 통한 부의 축적, 임노동자의 고용, 시장판매를 위한 작물재배로 근대적 농업을 이루었다.
조선 후기의 중세적인 경제구조의 동요되면서 새로운 생산양식의 범주가 확대되어 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는 여전히 중세적인 생산양식이 지배적이었다. 지주는 여전히 소작료와 고리대를 통하여 부의 축적과 전호에 대한 권한 강화하려고 하였고 삼정문란과 농민 수탈은 여전히 잔존하였다. 18세기의 근대적 생산양식의 발전의 부진으로 부농층의 농업경영도 부진을 면하지 못하고 직접 농업경영이 아닌 단순히 소작료와 고리대로 부의 축적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19세기에 이르러 농민들은 항조.항세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중세적 제도에 항거하는 농민항쟁을 일으켰으며 그것을 통해 근대적인 생산관계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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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연구회편, 『한국중세사회 해체기의 제문제』, 한울,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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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조선후기사회경제사』, 한길사, 1989
권태환, 1989. 한국 도시화과정의 평가, 국토개발연구원(미발간).
염정섭 1995 『농업생산력의 발달』 〈한국 역사 입문 2〉 한국역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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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3.23
  • 저작시기20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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