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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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격, 1987년 1월 '반(反)부르주아 자유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후야오방 총서기가 민주화시위처리 문제와 관련, 당의 집단지도원칙을 위반했다는 비판을 받아 사임했다. 이로 인해 국가 전반에 걸친 개혁정책은 다소 주춤하는 듯했다. 1988년 이래 최악의 인플레이션 및 경기과열현상으로 사회불안이 가중되는 가운데, 그해 9월 보수파의 '경제환경의 정리 및 경제질서교정계획'이 채택되었다. 리펑[李鵬] 총리는 13전대회 3중전회 이후의 조정정책 성과를 평가하여 향후 2년간의 구조조정을 골자로 하는 농업정책의 강화, 에너지·교통·통신 등 기초산업의 강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한 경기과열과 관련, 자오쯔양 당총서기의 개혁노선을 간접 비판했다.
톈안먼 사건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 전 총서기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대학생들이 그의 명예회복을 위한 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베이징대학교 학생들이 지난 1986~87년 학생시위의 책임을 물어 후야오방 전 총서기를 퇴진시킨 정적(政敵)들을 간접 비난하고, 후야오방을 찬양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이는 일반시민이 가세하여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5·4운동 기념일에는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연달아 일어났다. 5월 13일 이후 톈안먼 광장에서 무기한 농성이 시작되면서 시위는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후야오방의 죽음을 계기로 표면화된 이 시위에서 학생들은 주로 정치개혁과 인권존중을 외쳤고, 이에 가세한 일반시민과 노동자들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물가고 등을 비난했다. 이들의 불만은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국지도층의 무능과 부정부패에 집중되었다.
덩샤오핑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리펑 총리,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은 온건책을 주장하는 자오쯔양 총서기와 후치리[胡啓立] 정치국 상무위원에 대응하여 강경책을 폈다. 5월 20일 리펑 총리가 베이징 일부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이후, 6월 3일 베이징 중심지역에 계엄군이 진주하기 시작했다. 6월 4일 계엄군이 톈안먼 광장을 무력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톈안먼 사건 이후 자오쯔양 총서기가 민주화 시위를 지시, 당을 분열시켰다는 이유로 총서기, 중앙군사위원 제1부주석, 정치국 상무위원 등의 당직에서 해임되었다. 후치리 역시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서기직을 사임했다. 이들의 후임으로 장쩌민[江澤民] 상하이 시 당서기가 신임 총서기로 선출되었고, 쑹핑[宋平] 당중앙조직부장 및 리루이환[李瑞環] 톈진[天津] 시장이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다. 1989년 11월 6일부터 열린 13전대회 5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이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사임하고 후임에 장쩌민 총서기가 선출되었다. 또한 1990년 3월 덩샤오핑은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사퇴하고 장쩌민 총서기가 이 직책을 계승했다. 리펑 총리는 1990년 1월 11일 계엄령을 해제하고 톈안먼 광장을 개방하는 등, 사건 이후 악화되었던 대외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최근의 동향
정치적 상황 면에서 중국 당국은 1990년 6월 베이징 주재 미국대사관에 피신해 있던 반체제인사 팡리즈[方勵之] 교수 부부의 출국을 허용함으로써, 톈안먼 사건 이후 악화된 서방국가와의 관계개선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어 1990년 9월 22일에서 10월 7일까지 베이징에서 제11회 아시아 경기대회를 개최하여 그동안 실추된 대외 이미지를 회복하는 작업을 가속화했다. 그해 12월 13전대회 7중전회에서 보수파의 우위를 바탕으로 양 세력이 일시적인 타협을 이루었다. 이 회의에서 국가 실정에 맞는 사회주의 건설, 개혁과 개방 정책의 지속적인 추진 등을 기본원칙으로 채택했다. 1992년 14전대회에서는 톈안먼 사건을 '반(反)혁명폭란'에서 '정치풍파'로 재평가했다. 또한 1993년 2월 이 사건을 주도했던 2명의 학생지도자를 가석방했다. 중국이 톈안먼 사건 후 경찰수배명단 1호에 올라 있던 왕단[王丹] 등을 석방한 것은 서방의 인권침해 비난을 무마시키고, 대외문제에서 인권을 우선시하겠다고 공언해온 미국 클린턴 정부에 대처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한편 2000년 하계 올림픽 대회를 베이징에서 유치하려는 의지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14전대회에서는 양상쿤 국가주석의 당직은퇴를 공식 결정했다. 양상쿤의 은퇴는 막후 최고실력자 덩샤오핑의 '당의 세대교체' 요청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전인대 상무위원장 완리, 정치국 상무위원 쑹핑·야오이린[姚依林], 우쉐첸[吳學謙] 부총리, 친지웨이[秦基偉] 국방부장 등의 원로정치국원들이 중앙위원에서 제외되었다. 1993년 14전대회 2중전회에서 국가주석에 장쩌민 총서기, 부주석에 룽이런[榮毅仁] 전 국제신탁투자공사 이사장, 전인대 상무위원장에 차오스[喬石] 정치국 상무위원이 선출되었다. 이 인사안은 덩샤오핑의 기본구상에 보수파들의 주장을 절충시킨 개혁파·보수파 간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지도부의 세대교체·전문화가 실현되었으며 장쩌민 총서기가 국가 최고지도자로 확정되었다(→ 톈안먼 사건).
지난 1987년 중국과 타이완의 자유왕래가 허용된 이래, 중국에 대한 타이완의 투자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다. 공식적으로는 직교역이 금지되어 있어 타이완의 대중국 투자는 홍콩을 경유하는 간접투자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질·양 면에서 모두 교역의 규모가 확대되고 있다. 1993년 3월 타이완은 중국 대륙의 기업인들이 타이완 내에서 합법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할 방침임을 발표했다. 또한 타이완의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은 앞으로 3년 이내에 베이징을 방문하여 중국 지도자들과 역사적인 회담을 갖기 위해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 중국은, 1997년 중국에 반환되는 홍콩에 관하여 영국과 비밀협약에 합의했는데, 그 내용은 홍콩에 제한된 민주주의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이 협상에서 1997년에 결성될 홍콩 입법회의 전체의석 60석 중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의석을 종래의 18석에서 20석으로 늘릴 것에 합의했다. 또한 1993년 1월 장쩌민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홍콩 이외에 타이완·마카오 문제에 있어서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존하는 1국 2체제 원칙을 고수해나갈 것을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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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5.02
  • 저작시기20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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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33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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