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세이도의 회사 설립과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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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쇼와 60년 5월, 동경 平和(헤이와)섬 연안에 있는 물류 창고에는 매일 5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방문한다. 資生堂이 개발한 4 종류의 모델 점포에 체인스토어의 점주 및 資生堂 그룹 각 사의 2만 명에 달하는 전 사원이 교대로 견학을 오는 것이다. “화장품 가게가 아니다. 패션점이다.” “아니다, 편의점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다” 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지금까지의 화장품 점의 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창업 이래 113년 동안, 일본 여성의 미를 군림해 온 資生堂이, 지금까지 터부시 해 온 소매유통점에도 손을 대는 판매정책의 대전환을 시작한 것이다.
[회사의 연혁]
資生堂은 메이지 5년, 당시 해군 약제감의 福原有信(후지하라 코우신)씨가 동경 긴자에 “生堂 약국”을 개업한 것을 기초로 설립되었다. 메이지 21년에는 일본 최초의 크림치약을 발매하는 등, 배스 용품과 화장품의 겸업 메이커였다.
화장품 메이커는 그 판매형태에 따라 도매유통의 일반품 메이커, 資生堂과 같이 도매상을 통하지 않고 직판을 하는 제도품 메이커, 가정 및 직장에서 세일즈맨이 파는 방판품 메이커의 3가지로 분류 된다. 전쟁 이전에는 “서쪽의 클래스(中山太陽堂), 동쪽의 레토(平尾贊平商店)” 등으로 불리며 일반품 메이커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어, 資生堂은 중견의 고급품 메이커에 지나지 않았다.
쇼와 25년에는 업적부진으로 도산직전까지 갔지만, 資生堂이 급성장한 것은, 쇼와 30년대에 들어서부터였다. 당시의 화장품 업계는 독금법의 일부 개정에 의해 재판제(소매유통점에서의 정가판매: 이후 정찰제로 통칭)의 도입과 외자의 자유화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당시의 資生堂은 이미 12년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도입한 ‘자영 체인시스템’과 지도판매를 강화, 같은 회사의 제품만을 판매하는 ‘전용 코너 제’를 확립, 지금의 번영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쇼와 60년 현재, 資生堂은 세계 제3대 화장품 메이커의 자리에 까지 성장하여, 전국에 3만 5천 개점의 체인스토어, 15만개 점의 자영 상품취급점을 보유하여, 작년의 총 판매는 3233 억엔, 경상이익은 304억엔, 순이익은 126억 엔이었다. (58, 59년도의 재무제표는 첨부자료 1에 나타남)
이 資生堂에게 압도적인 힘을 실어준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손에 꼽자면, 전국에서 2만 5천 점 남짓에 달하는 “체인점 전개”와 4계절 각 절기 별 시즌 프로모션으로 대표되는 “광고”의 2 가지로 좁혀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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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1.12
  • 저작시기2009.3
  • 파일형식워드(doc)
  • 자료번호#573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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