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철학]조선 성리학 이황 교육사상(교육철학), 조선 성리학 이이 교육사상(교육철학), 조선 실학 유형원과 이익 교육사상(교육철학), 조선 실학 이덕무 교육사상(교육철학), 조선 실학 정약용과 홍대용 교육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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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육철학]조선 성리학 이황 교육사상(교육철학), 조선 성리학 이이 교육사상(교육철학), 조선 실학 유형원과 이익 교육사상(교육철학), 조선 실학 이덕무 교육사상(교육철학), 조선 실학 정약용과 홍대용 교육사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조선 성리학 퇴계 이황 교육사상(교육철학)

Ⅱ. 조선 성리학 율곡 이이 교육사상(교육철학)

Ⅲ. 조선 실학 반계 유형원 교육사상(교육철학)
1. 교육목적
2. 교육내용
3. 교육제도
4. 교육사상
5. 저서

Ⅳ. 조선 실학 성호 이익 교육사상(교육철학)

Ⅴ. 조선 실학 형암 이덕무 교육사상(교육철학)

Ⅵ. 조선 실학 다산 정약용 교육사상(교육철학)
1. 생애
2. 교육사상

Ⅶ. 조선 실학 담헌 홍대용 교육사상(교육철학)
1. 생애
2. 사상

참고문헌

본문내용

으로 한 후천적이며 경험주의적인 교육제도에의 개선 및 방법을 통하여 利用厚生과 經世澤民에 적합한 현실적인 교육내용을 강조하면서 이에 관련하여 당시의 낙후된 과학, 기술문명의 발전을 강조한 내용으로 요약된다 하겠다.
Ⅶ. 조선 실학 담헌 홍대용 교육사상(교육철학)
1. 생애
홍대용은 1731년(영조 7년) 충청도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에서 아버지 홍력(洪)과 청풍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홍대용의 가문은 선대는 남양(南陽)에서 나서 고려조에 이름을 떨친 금오공으로부터 정효공파로 번성하고 대대 문벌로 이름 높았다. 1741년 홍대용은 11살의 나이로 삼화부사로 부임하는 할아버지 용조(龍祚)의 행차를 모시고 관서로 여행하며 좋은 추억을 만들지만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용조는 죽음을 맞이한다. 이에 어린 손자인 대용은 허무한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는 12세에 석실서원(石室書院)으로 김원행(金元行)을 찾아가 수학을 하게 된다. 홍대용이 찾아간 석실서원은 한강 상류를 따라 광주와 양근을 거쳐 여주까지 이어지는 조선 후기 기호학파의 온상이었고, 고문운동을 중심한 새로운 시문풍으로 영정조시대에 두드러진 석실학파를 이룬 곳이었다. 대용은 이곳에서 10여 년간 기호학파의 실학적 분위기 속에서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21세때 송시열(宋詩烈)과의 노소분당(老少分黨)에 관한 논쟁에 의문을 갖고 이 문제로 송시열을 비난하여 스승 김원행에게 꾸지람을 듣고 사이가 소원해진다. 29세때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재직하던 아버지에게서 머물다가 나주의 숨은 과학자 석당(石塘) 나경적(羅景績)을 만난다. 나경적의 당시 나이는 이미 70이 넘었지만 그의 인격과 과학기술에 감명을 받고, 그와 함께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한다. 32세때 두 대의 혼천의와 자명종을 완성하여 충청도 천원군 장명부락에 설치하고, 이 사설 천문대를 농수각(籠水閣)이라 부른다. 35세때 연행 사행의 서장관이 된 계부 홍억(洪檍)의 자제군관이 되어 북경 여행길에 오른다. 이때 북경의 유리창(琉璃廠)에서 항주(杭州)의 선비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등과 사귀게 되는데 이들 세선비와의 교우는 평생 지속된다. 이 연행의 기록을 한문본 『담헌연기』 4권 1책과 한글본 『을병연행록』 10권 10책으로 남긴다. 37세가 되던 해 아버지의 별세와 함께 과거를 단념하고 삼년상을 치른다. 이때에 고향의 이웃 학생을 가르치면서 그때 학생들을 가르친 어록을 정리하여 「독서부결」(讀書符訣)이라한다. 42세때는 스승 김원행의 별세 소식을 듣고 「제미호김선생문」(祭渼湖金先生文)을 지어 조상한다. 과거는 보지 않았으나 44세 때 익위사 사직으로 선임되고 정조 즉위 후 사헌부 감찰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내직에 염증을 느껴 외직을 선망하여 47세 때 태인현감으로 외직으로 나가게 된다. 하지만 외직 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하여 53세 때 당시 영천군수로 있다가 어머니의 병환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으로 돌아와 그해 겨울 1783년(정조 7년)에 중풍으로 쓰러져 그해 죽음을 맞았다.
2. 사상
첫째, 담헌의 정치 및 사회현실관은 근본적으로 피치자인 노서민(奴庶民)의 입장에서 당쟁(黨爭)의 폐해와 유의유식(游衣游食)하는 당시 무사안일에 젖은 양반귀족의 태도를 통렬히 비판함으로써, 현실의 객관적 모순과 과제를 직시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판단은 주자학적 당위론의 입장에서 백성의 생활안정 보다는 차별윤리의 강화에만 몰두했던 유학적 사고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개혁의식이 그의 사상적 기조가 되었다. 따라서 담헌의 사상적 개조 노력은 현실안주가 아닌 현실극복을 요구하는 진정한 의미의 국가보위와 백성의 생활안정 및 복리에 토대를 둔 실학(實學)을 지향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담헌의 이기론(理氣論)은 봉건차별질서의 확립을 목표로 한 유학적 이기론에서 벗어나, 모든 개체가 생리력의 근원인 기(氣)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그러한 개체들이 각기 자존(自存)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기능론적 평등관에 입각한 이기론 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적 독창성 및 혁신성을 잘 나타내 주었다. 이(理)와 기(氣)를 한 개체를 이루는 두 기능으로 파악하는 이기론은 조선조의 반(反)주자학적 내지 반(反)유학적 정치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우주론으로서, 김시습(梅月堂 金時習)과 서경덕(花潭 徐敬德) 그리고 이 이(栗谷 李 珥)를 거쳐 담헌에 이르러 그 독창적 기틀이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담헌을 선두주자로 하는 후기 실학은 한국정치사상의 자주적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담헌사상의 선구자적 중요성 크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담헌의 국내 및 대외질서관은 기본적으로 대내적으로는 자연계를 이루는 인간 및 개물(個物)의 고유한 가치를 상호인정하고, 대외적으로는 국가간 관계의 평등성을 지향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담헌의 질서관은 서구과학지식의 습득과 노장(老莊)의 상대적 평등관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담헌사상의 폭과 깊이를 이해할 수 있게 하였고, 궁극적으로 한민족(韓民族)의 자주성과 주체적 발전을 욕구 했던 담헌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넷째, 담헌의 정치 및 사회개혁적 정책론은, 실학자로서 실사구시(實事求是)적 입장에서 묵가(墨家)의 생산정치론을 원용하여 능력에 따른 관직배분과 국민개육(國民皆育) 및 국민개로(國民皆勞)를 강조하고, 현실의 요구에 적절히 대응하는 변통(變通)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정책론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정책적 방안마련에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중국을 통해 서구문물 및 과학적 지식을 과감하게 습득하고 이를 평등관의 입장에서 노서민을 주체로 한 국가발전에 적용하려 하였다.
참고문헌
김경덕, 율곡의 연구, 한국 연구 도서관
서울대학교, 퇴계 학파와 이 철학의 전개
안장리(1994), 이덕무론, 조선후기 한문학작가론, 집문당
이정화(2005), 퇴계 이황의 언행론에 대한 고찰, 韓民族語文學, Vol.46
이종호(1994), 율곡 인간과 사상, 지식산업사
조현규(2002), 한국 전통윤리사상의 이해, 새문사

키워드

성리학,   이황,   이이,   실학,   유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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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3.2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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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94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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