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 - 우리나라의 고전작가들과 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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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전문학 - 우리나라의 고전작가들과 그 작품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이규보
2. 김시습
3. 허균
4. 허난설헌
5. 정약용
6. 균여대사
7. 일연
8. 이황
9. 이이
10. 송순
11. 정철
12. 윤선도
13. 신재효

본문내용

식만을 받고 그 보관물을 다시 돌려주었다.
신재효가 중인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 재산을 털어서 판소리에 몰두하게 된 동기는 분명하지 않다. 국문학계에서는 이러한 동기에 대하여 몇 가지의 추정을 내리고 있다.
우선 서양의 경우처럼 일반적으로 경제적인 안정을 누리는 계층이 예술작품을 상품으로 사들이게 되는데, 신재효의 판소리에 대한 관심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향리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판소리를 지원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는 향리로서 각종 연회(宴會)에 판소리의 창자(唱者)를 포함한 가객과 기녀(妓女)를 동원하는 일을 주선하였을 것이고, 또 고창현에 당시의 예능인들과 자주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신재효의 판소리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지역적시대적 측면 외에 이러한 개인의 신분적인 측면을 고려했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곧 그의 판소리 활동은 중인들의 예술 지원을 통하여 신분상승의 욕구를 대신 충족시키려는 보상행위로 이해되며, 아울러 그것은 고창이라는 지역적인 토양과 신재효 자신의 투철한 현실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신재효는 판소리의 단순한 감상자가 아니었다. 그는 판소리를 배우러 오는 수습생을 모아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집단적으로 실시하였다.
신재효는 아전의 신분이면서도 판소리를 애호하고 후원하였기 때문에 신분상승이 가능했으며 또한 풍류를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정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가정적인 슬픔이 그로 하여금 판소리 광대를 후원하고 사설을 개작하며 단가를 창작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신재효는 73세(1884, 고종 21)를 일기로 고창의 집에서 자신이 태어난 날짜와 똑같은 11월 6일 세상을 떠났다.
신재효는 판소리 전문교육 이외에도 그는 판소리의 사설을 정리, 개작하고 판소리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려고 하였다. 그는 그가 창작한 단가 「광대가」에서 또한 판소리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는 판소리의 창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네 가지 요건으로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를 들었다. 이것을 학계에서는 ‘판소리의 4대 법례(法例)“라고 부른다. 그는 판소리 공연의 주체를 창자로 이해하고 있었고, 판소리의 공연예술적인 특징을 파악하고 있었으니, 오늘날 판소리가 나아가는 방향을 예견한 탁견이라 할 만하다.
신재효가 판소리사에 끼친 또다른 업적은 전승되는 판소리의 사설을 정리하고 개작한 점을 들 수 있다. 그는 기존에 전승되는 판소리 가운데 6편의 사설을 정리하고 개작하였다. 그 6편(또는 여섯 마당)은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 그리고 「변강쇠가」를 말한다. 원래 판소리는 ‘열두 마당’이라 하여 상당히 많은 작품이 전승되고 있었지만 신재효는 이를 여섯 작품만을 택하였다.
신재효는 전승하던 판소리를 정리하면서 기존의 사설에서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과감히 개작하였다. 판소리의 사설을 한 개인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창자의 의식 또는 현장의 상황에 따라 변화하고 바뀐다. 그러므로 부분과 부분 사이에 상호 모순이 나타나는데 이를 ‘부분의 독자성’이라고 한다. 신재효는 그 ‘부분’으로 볼 때는 이의(異意)없이 지나칠 수 있는 사설을 ‘전체적인 면’에서 조감하고 그 합리성을 문제삼은 것이다.
또한 신재효는 선악의 윤리적인 문제에 관한 한 철저하게 전형적인 인물로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신재효는 또 판소리 연창(演唱)에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드려냄으로써 ‘작중개입(作中介入)’을 시도하고 있다.
신재효가 개작한 판소리 사설에는 판소리가 원래 갖고 있던 육담(肉談)이나 욕설 등이 사라지고 한문투의 표현이 많이 발견된다.
신재효는 중인이라는 신분적인 한계를 절감한 탓에 조선조 신분사회의 모순을 문제 삼을 줄 알았다. 나아가 향리로서 겪었던 부패된 현실을 날카롭게 폭로하였다.
신재효는 6편의 판소리를 택하여 사설을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단가(短歌)를 직접 창작하기도 하였다. 그가 남긴 단가에는 「허두가(虛頭歌)」, 「성조가」, 「어부사」, 「호남가」, 「광대가」, 「명당축원가」, 「치산가」, 「십보가(十步歌)」, 「오섬가(烏蟾歌)」, 「도리화가(桃李花歌)」, 「구구가(九九歌)」 등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단형(短形) 내지는 중형(中形)의 판소리로서 판소리를 시작하기 전에 부르는 단가라 할 수 있다.
이들 단가는 신재효의 판소리의 지향과 의식 등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 신재효나 그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 후기의 문화적 실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런데 신재효의 단가를 보면, 판소리의 이론을 모색하거나 돈을 모으고 사랑을 하는 인간의 감정을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는 당대의 시대적 아픔을 의식하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어서 주목된다.
신재효가 창작한 작품들은 판소리의 허두가라는 부속물로서의 위치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문학으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보여준다. 물론 그이 창작 단가나 판소리 사설의 개작을 두고 판소리사의 흐름에 역행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판소리적인 관습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그이 노력은 결국, “전통적, 그리고 당대적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음이 분명한 사실이다.
<감상>
고전작가론 수업을 들으며 배운 작가들도 여럿 있었고, 또 내가 조사한 작가인 김시습님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또 익숙치 않았던 한문학에 대해서도 한발짝 다가선 듯한 뿌듯함도 있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불우한 어린시절,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불의에 항거하며 자신들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였다. 그들의 삶에 가시밭길이 있고 험난한 모함들이 있었기에 어쩌면 그들이 더욱 주옥같은 가치를 지닌 작품을 내어놓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훌륭한 곡식은 돌피 익은 아름다움을 받아들이지 않고
가는 티끌도 오힐 거울 닦는 산뜻함을 해치게 되니,
정(精)에 지나친 시어(詩語)는 모름지기 깍아벌리 것이요,
노력해서 공부하여 각자 날마다 새로울지니라.
- 「증이숙헌(贈李叔獻)」
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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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08
  • 저작시기2005.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08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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