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필름 (신상옥 필름)에 대한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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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필름 (신상옥 필름)에 대한 조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신필름의 설립자 (신상옥에 대하여)

2. 신필름 흥망사

3. 신상옥의 영화세계
1) 한국 영화사의 중앙로
2) 50년대 영화의 경향
3) 60년대 신상옥의 영화적 배경들
4) 60년대 작품들
5) 70년대 이후 현재까지

4. 각 작품의 설명

5. 신상옥 감독 인터뷰

본문내용

찍은 거요. 안양촬영소가 있으니까 가능했지. 말 달리는 장면에서 자막이 나와야 하는데 그게 사라진 상태라 답답하더구만. <연산군>도 그래. 그 영화에서 처음으로 데이 포 나잇을 시도했는데 노출을 투 스텝 낮추고 역광으로 찍어야 하거든. 근데 요새는 전부 낮 신으로 방영해버리더구만. <무숙자>에서도 밤 신이 다 하얗게 나와. 증인이 없으니까 아무도 몰라서 그렇게 된 거야.
-요즈음 들어서야 본격적인 액션영화가 다시 나오고 있는데요. 하나씩하나씩 장르를 넓혀가는 시기라고나 할까요. 60년대에 감독님이 그토록 다양한 장르를 시도할 수 있었던 배경이 뭘까요.
첫째는 예술가로서의 얄팍한 야심이고, 둘째는 블록 부킹 때문이야. 영화법상 회사를 유지하려면 한달에 두편씩 일년에 스물여덟편을 찍어야 하는데 다양한 장르를 개척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지. 먹고살려고 한 거지, 다. 세 번째라면 내 딴에는 테크닉이 확실하다, 뭐든지 소화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고, 또 하는 동안에는 열심히 했어. 뭐든지. 자본주의에는 스타시스템이란 게 있는 것처럼, 내 영화가 히트하니까 배급업자들이 자꾸 내거만 가져가려고 했어. 내 회사를 가지고 마음대로 했으니 좋았겠다고 하는데, 아니야. 내가 연출에 나서는 건 늘 회사 부도 막느라고 목까지 차올라서 힘들 때 했지. <빨간 마후라>도 아주 힘들게 만든 영화야.
*박정희와 반공법
-신필림의 위력에서 최은희 선생님을 비롯한 스타시스템의 위력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데요.
다른 데서도 많이 했어. 그렇지만 많은 중요한 배우들이 전속이었지. 한꺼번에 네 작품씩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
-스타성 말씀을 하셨는데, 배우 최은희와 감독 신상옥 가운데 누가 더 인기 요인이었을까요. 최 선생님이 출연하는 거와 신 감독님이 연출하는 거와 어떤 게 더 스타성이 있었을까요.
(잠시 망설임) 모르지. 여자들이야 최 여사 나오는 걸 더 좋아했겠지. 현모양처로 나왔으니까. 현실은 현모악처지만. (웃음)
-옛날 잡지 기사를 보니까 최 선생님이 신 감독님의 창작적 동반자로 신필림의 많은 연출 아이디어 가운데 상당부분이 최 선생님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던데요.
우리는 비주얼에 강하고, 최 여사는 연극을 해서 드라마에 강한 건 있었지. 그래서 내가 드라마 공부한 감독들 많이 기용했다고. 근데 비주얼도 중요하지. 연기자한테 연출시키면 감정선만 따라가고, 시나리오 작가한테 시키면 책 쓰듯이 찍고 그런다고. 지금 TV <명성황후> 잘 찍긴 하는데, 그 사람 보고 영화하라면 힘들 거야. 늘어놓기만 해서. 압축을 해야 하거든.
-<연산군> 프린트는 왜 없애라구 하신 건가요.
저예산으로 엉터리로 찍었으니까. 지금도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내가 <연산군>을 싫어하는 이유가 뭐냐면, 전편 찍고나서 후편을 한달반 사이에 찍었거든. 각본도 없어서, 내일 뭘 찍어야 되는지도 모르고. 밤늦게 시나리오 내일치가 나오면 복사기도 없어서 먹지대고 다 써가지고, 아침 6시 되면 나오는 사람들한테 그거 주고. 소도구와 의상은 아예 비원에 맡겨놨어. 그래서 한 얘기 또 하고 그런 게 많고, 템포니 뭐니 다 처져. 이북에서 내가 감옥에서 죽겠다 싶을 때, 이럴 바에 없애고 싶은 거나 없애고 죽자 해서 편지에 그거 태우라고 썼지. 근데 프랑스 놈들은 그게 또 제일 좋다고 하니.
-박정희 대통령 좋아하신 것 때문에 박 정권이 만들어낸 영화법도 주도적으로 만드셨을 거라는 평판이 있습니다.
빈농의 아들이니까 그런 면에서 긍정적으로 봤지. 공무원들 복지부동하는 것만 보다가 박정희를 보고는 최소한 필요악은 된다고 생각했지. 그때 시대론 그랬던 건데. 박정희 두둔하려고 만든 게 아니라, 워낙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던 때니까. 영화법이란 건 나는 잘 모르고, 내가 커지니까 내가 관여했냐고 그러는데, 그건 아니다.
-신필림을 할리우드의 메이저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한국영화산업에서 전무후무한 사례인데.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살아서 영화에 대해 이해가 있는 편이었다구. 이 대통령이 안양촬영소 상량식할 때 나와서 ‘영화인은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축사한 게 있지. 근데 잘못한 게, 시설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 거지. 시설은 만들었는데 머리는 따라오지 못했지. 결국 산업은행으로 넘어갔어.
나중엔 풀이 우거지고 소가 왔다갔다 하는 지경이었으니까. 기계란 기계는 다 도둑질당하구. 근데 내가 신필림을 세울 때 콜럼비아를 따서 만들었거든. 그래서 안양촬영소를 인수했지. 스튜디오가 400평짜리, 200평짜리가 있었고 현상소도 있었고, 녹음기도 제일 좋은 거로 들여놓았지. 지금 양수리 종합촬영소 가보면 꼭 텔레비전 촬영소 같아. 물건 갖다놓을 데도 없고, 오픈 세트는 산중에 있어서 산불위험도 있어. 안양촬영소 인수한 거는 은행에서 빌려서 시작한 거였는데 나중에는 지탱할 수가 없었어.
-결정적으로 힘들어진 이유는 뭐였나요.
검열 때문이야. 미칠 지경이었지. 정치적인 건 말할 것도 없고 미풍양속이란 것 때문에. 키스나 정사장면도 외국사람들 건 그냥 들어오는데 우리 영화는 그게 절대 안 되고. 전기료만 그때 돈으로 400만원이 기본요금이었는데, 유지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 영화법도 피해를 줬어. 제작쿼터를 1년에 4개씩 줬는데 그걸로는 못 먹고 살았지. 200평짜리 스튜디오가 있으면 영화사 등록을 할 수 있었거든. 우리는 600평을 가지고 있으니까 영화사를 3개 만들어서 제작쿼터를 더 땄다구. 그때 정치적으로 내가 움직였으면 훨씬 발전했을지 모르지. 정주영도 완전히 국가차관으로 한 거였으니까.
-반공법에 한번 걸린 적도 있으시죠.
아시아영화제 집행위원을 했었거든, 내가. <민비>가 작품상을 땄을 때야. 그 영화제 출품작 중에 <일본 도둑이야기>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그게 공산당이란 건 알았는데, 상영했지. 그게 반공법에 걸린 거야. 그래서 공안부 끌려가서 한바탕했지. <내시> 가지고도 유죄판결 받았잖아. 음란죄라고. 많은 대중 앞에서 음란행위했다는 건데, 거기서 말하는 대중이라는 게 스탭들이거든. 근데 윤정희라는 애가 어디 벗을 애야? 브래지어도 하고 핫팬츠도 입었는데, 음란에 걸렸지. 관례에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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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11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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