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과 중국의 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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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편전쟁과 중국의 개국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아편전쟁의 배경
1. 광동무역체제(廣東貿易體制)
2. 아편전래와 은의 유출
3. 이금론(弛禁論)과 엄금론(嚴禁論)
4. 임칙서의 아편 대책

Ⅲ. 아편전쟁의 과정
1. 제1차 아편전쟁
1)전쟁의 시작과 「천비조약(川鼻條約)」
2)청조의 대영 선전 포고와 「광주화약(廣州和約)」의 조인
3)영국의 침략 전쟁 확대와 청조의 항복
4)아편전쟁의 패인
5)남경조약(南京條約)과 일련의 불평등 조약의 체결
2. 제2차 아편전쟁
1)조약 개정과 애로우호 사건
2)영․프 연합군의 북상과 「천진조약(川津條約)」
3)영․프 연합군의 북경 점령과 북경조약의 체결

Ⅳ. 아편전쟁과 중국의 개국 그리고 동아시아
1. 아편전쟁과 중국의 개국
1)근대화에 미친 영향
2)외세침탈의 출발점
2. 아편전쟁과 일본
1)서양세력에 대한 일본의 반응
2)난학(蘭學)자의 팽창론
3)국학자들의 민족의식 고취
4)개국요구에 대한 막부의 대응
5)일본의 개국과 아편전쟁
3. 아편전쟁과 조선
1)서양세력에 대한 조선의 반응
2)서양세력 및 일본의 개국요구에 대한 정부의 대응
3)조선의 개국과 아편전쟁

Ⅴ. 결론

본문내용

보·타협정책을 취했다. 시모노세키조약에 조인했고, 청·러밀약, 베이징조약 등에 관여했다. 근대공업 진흥을 위해 노력했다. 조선 내정과 외교에 관여했다.
의 서한을 갖고 돌아와 개국론에 찬성하였고 고종도 개국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국제법에 대한 지식이 없어 근대적 외교교섭에 아무런 사전준비 없이 회담에 임하였고, 이러한 조선정부의 협상에 대한 수동적 태도로 일본정부는 약점을 간파하였고 불평등조약을 체결했다. 더욱이 1876년 조일수호조약을 체결하였으나 이것이 개국정책을 채택한 것은 아니었으며 여전히 서양국가들에 대한 조선정부의 쇄국정책은 그 후에도 바뀌지 않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국은 1882년 미국과 조선간의 조미수호조약 이후가 되었다.
3)조선의 개국 조선의 개국은 강화도 조약으로 시작된다. 강화도 조약은 한 ·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종래의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통문관계(通文關係)가 파괴되고, 국제법적인 토대 위에서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강압 아래서 맺어진 최초의 불평등조약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에 맞서 개화론자들은 부국강병을 위해서 개화사상을 도입하고 문호를 개방하여 대외통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과 아편전쟁
1840년 청국에서 아편전쟁이 발발했을 때 조선사회는 선교사의 진출이 서구세력의 침입을 끌어들이는 요인이 된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천주교탄압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그 후 10년간 대외적으로 쇄국양이정책을 고수하던 대원군이 민비를 중심으로 한 외척세력의 정치공세로 1873년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이는 실패한 국내정치와 함께 당시 국제정세 상, 일본은 물론이고 종주권을 인정해 온 청국까지도 개국정책을 취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대원군이 강력한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대외관계를 악화시켰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새롭게 권력을 장악한 민비와 개화파들은 대원군의 정책을 뒤집어엎는 데에만 관심을 두었지, 국제정세를 잘 살피지 못했고 이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서양세력과 적극적으로 통상을 하고자 하는 의지부족과 국제법의 이해 등 수교에 필요한 방법적인 면에서 아무런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면서 근대화로서의 이행에 있어 외부세력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Ⅴ. 결론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정상회담을 앞두고 중국정부와 영국정부 사이에 양귀비꽃을 사이에 두고 약간의 신경전이 있었다. 영국인에게 양귀비꽃은 1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의미한다. “플랑드르 들판에 양귀비꽃 피었네/줄줄이 선 십자가들 사이에/...우리는 이제 운명을 달리한 자들/며칠 전만 해도 살아서 새벽을 느겼고 석양을 바라보았었네...”
1915년 유럽 플랑드르 전선에 투입된 캐나다군 군의관 존 매크레이가 전사한 전우의 무덤가에 흐드러지게 핀 붉은 양귀비꽃을 보고 쓴 시<플랑드르 들판에서>는 1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독일이 항복을 선언한 11월11일이 올 때마다 영국인들은 이 시에 나오는 붉은 양귀비꽃 배지를 사서 달고, 수익금은 참전 군인들을 돕는 기금으로 쓴다.
그러나 중국에게 양귀비꽃은 이 글에서 살펴본 아편전쟁에서의 슬픈 역사를 담고 있다. 서구의 군사력 앞에 처절하게 무릎을 꿇고 1842년 난징조약을 맺어 홍콩을 내주고, 몰수했던 아편에 대한 거액의 보상금까지 내야했다. 아편전쟁으로부터 170여년이 흐른 오늘, 막강한 경제력을 갖게 된 중국은 ‘모욕의 세기’를 뒤로하고 우뚝 일어서(大起)새로운 세계질서를 꿈꾸고 있다. 중국이 더 많은 물건을 사주고 더 많은 투자를 해 휘청거리는 경제를 살려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유럽 각국이 중국에 손을 벌리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제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중국식 질서’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위안화 환율과 달러 기축통화체제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치열한 ‘화폐전쟁’이 그 상징이다. ‘아편전쟁’에서의 패배의 아픔을 ‘화폐전쟁’으로 치유하고 있다. 아편전쟁이 밖에서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간 것이라면 화폐전쟁은 안에서 밖으로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다. 붉은 양귀비꽃에 대한 동서양 기억의 거리만큼 ‘중국의 시대’는 ‘미국의 시대’와는 다른 세계질서를 예고한다. 서구 시대의 종언이다. 하지만 중국식 세계질서는 아직 세계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 국내외의 수많은 모순과 도전에 부닥쳐 있는 중국은 경제 사회적 개혁을 강조하고 있지만, 서구식 질서에 ‘노’라고 말하는 것 외에 분명한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옛 질서가 몰락하고 있지만 새 질서가 보이지 않는 불안한 아노미의 시대이다. 혼란은 위기이자 곧 기회이다. 과거 근대 초기 아시아는 혼란한 국제질서 속에서 패배자가 되었다. 그 아픈 역사를 다시 돌아보고 우리의 모순점을 찾아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중국의 개국, 아시아의 개국의 시발점이 되었던 아편전쟁에서 동아시아체제가 처절하게 짓밟힐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과오를 다시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한다. 역사를 배우지 않는 자보다 더 어리석은 자는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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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0.11.19 “[특파원칼럼] 아편전쟁과 화폐전쟁” 박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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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3.28
  • 저작시기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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