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의 생애
1. 유년기(1896 ~ 1913)
2. 청년기(1914~1920)
3. 장년기(1921~1948)
Ⅲ.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의 작품
Ⅳ.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의 작품세계
Ⅴ.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의 인상파적 자연주의
Ⅵ.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의 여성인권옹호
참고문헌
Ⅱ.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의 생애
1. 유년기(1896 ~ 1913)
2. 청년기(1914~1920)
3. 장년기(1921~1948)
Ⅲ.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의 작품
Ⅳ.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의 작품세계
Ⅴ.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의 인상파적 자연주의
Ⅵ.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의 여성인권옹호
참고문헌
본문내용
더 세련된 필치가 보인다. 여행 시에 그린 작품들 중 「스페인 해수욕장」은 평면적인 표면에 인지되는 배경형태를 순간적으로 처리하는 분석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비슷한 여행시기에 그린 「스페인국경」보다는 훨씬 더 안정감이 느껴진다. 세부적 묘사가 거부된 형태감각과 수면 위의 반짝이는 광선과 대기의 흐름 등이 뛰어난 표현감각이 잘 나타났다는 것이다. 견고한 물질성을 강렬한 광선속에서 흔들리는 허약한 ‘일루전’으로 치환시켜 버렸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끈다.
후에 그녀의 작품은 야수파적인 경향이 강해지기 시작하지만 1930년대 전후 가정적인 파탄과 경제적 궁핍 등으로 인하여 작품의 능력과 질도 퇴색하고 점차 작품활동도 적어진다. 「인천풍경」을 예로 들자면, 1931년 이혼하게 되자 절망과 생활고, 사회적 고립으로 인한 정신력 약화는 바로 작품으로 이어지게 된다. 생활고로 유화물감을 제대로 쓸 수 없는데다가 기량 면에서의 퇴색도 느껴진다. 이후에도 많은 작품을 제작하고 전시회도 개최하지만 기법면의 퇴보와 사람들의 냉담으로 후에는 작품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불행한 말년을 보낸다.
Ⅵ.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의 여성인권옹호
나혜석은 합리적 이성을 가진 자율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여성도 그런 인간으로 살 수 있으며 또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학교 시절부터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공부도 잘했지만, 그는 31운동 관련으로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불행 중 다행으로 반 년 감옥생활 중에 더할 수 없는 구속과 보호와 징역과 형벌을 당해 가면서라도 옷자락을 뜯어 손톱으로 편지를 써서 운동 시간에 내던지던 갖은 기묘한 일이 많았던 조그마한 경험”을 했고, “사람이 하려고 마음만 있으면 별 일이 생기지 못할 일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모(母)된 감상기(感想記)」). 이 경험은 이후 그의 생활 전체를 지배하면서 그가 자신의 생각하는 바를 추동해 나가는 힘이 되었다.
나혜석이 생각한 이상적 여성은 합리적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열정을 가진 인간이다. 나혜석은 최초로 발표한 글 「이상적 부인(理想的 婦人)」(1914.12)에서, 습관에 따라 세속적 본분인 현모양처를 이상으로 정할 것은 아니라고 했다. 나혜석이 살았던 시대 여성들에게 요구된 규범은 겨우 ‘삼종지도’를 벗어난 ‘현모양처’론이었다. 이러한 현모양처론은 여성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근대 국민의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역할을 잘 할 수 있어야 하므로 여성에게도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점에서 근대적인 것이었다.
나혜석은 생활 개량 등을 주장하는 데서 나아가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에 대해 적극적인 주장을 하게 되었다. 우선 이혼 논란을 겪고 있던 당시 기자와의 대담에서 나혜석은 ‘시험결혼’을 주장하였다.(「우애결혼시험결혼」1930.5)
이혼 후 나혜석은 두 남녀의 연애, 결혼, 이혼 과정의 보고서일 뿐만 아니라 이혼 시 아내의 재산분할권과 자식에 대한 친권행사를 인정하지 않는 제도에 대한 고발의 의미도 있는 「이혼 고백장」(1934.8~9)과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독신으로 사는 여성의 입장에서 정조와 성욕, 모성 문제를 제기한 「신생활에 들면서」(1935.2)를 발표했다. 「이혼 고백장」이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한 가정 안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만천하에 공포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일차적으로 충격을 받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정조에 대한 남녀 평등의 주장이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 이 어이한 모순이냐. 상대자의 불품행을 논할진대 자기 자신이 청백할 것이 당연한 일이거늘 남자는 명목 하에 이성과 놀고 자도 관계없다는 당당한 권리를 가졌으니 사회제도도 제도려니와 몰상식한 태도에는 웃음이 나왔나이다.(……) 아아, 남성은 평시 무사할 때는 여성이 바치는 애정을 충분히 향락하면서 한번 법률이라든가 체면이라는 형식적 속박을 받으면 어제까지의 방자하고 향락하던 자기 몸을 돌이켜 오늘의 군자가 되어 점잔을 빼는 비겁자요 횡포자가 아닌가. 우리 여성은 모두 이러한 남성을 저주하고자 하노라.
「신생활에 들면서」에서 나혜석은 한 걸음 나아가 정조란 누가 누구에게 강요할 수 없는 ‘취미’라는 주장을 폈다.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것과 같이 임의용지(任意用志)로 할 것이요,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해방은 정조의 해방부터 할 것이니 좀더 정조가 극도로 문란해가지고 다시 정조를 고수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저 파리와 같이 정조가 문란한 곳에도 정조를 고수하는 남자 여자가 있다니 그들은 이것저것 다 맛보고 난 다음에 다시 뒷걸음치는 것이다. 우리도 이것저것 다 맛보아가지고 고정(固定)해지는 것이 위험성이 없고, 순서가 아닌가 한다(「신생활에 들면서」).
나혜석이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정조를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 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음식을 좋아하느냐와 같은 ‘취향’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도 그런 성용과 취향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남녀 동등하게 정조를 지켜야 한다고 하든 동등하게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든, 사회적으로 규범화된 ‘정조 관념’은 억압성을 가진다는 것을 간파하고 정조란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취향-취미의 문제이지 규범화하여 강제할 것이 아니라고 하는 나혜석의 주장은 기성의 도덕 관념을 해체시키는 매우 선구적인 발언이다.
참고문헌
김영기(1958), 한국 여성 미술 40년사, 한국여성 문화 논총, 이화여대
동아일보(1921, 3, 18), 양화가 나혜석 여사
박명숙(1996), 나혜석의 작품에 나타난 사상연구, 대구 효성 카톨릭 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이경성(1980), 한국근대회화, 서울, 일지사
장안갤러리(1995), 나혜석의 생애와 예술
Lilian R. Furst·Peter N. Skrine, 천승걸 역(1997), 자연주의, 서울대학교 출판부
후에 그녀의 작품은 야수파적인 경향이 강해지기 시작하지만 1930년대 전후 가정적인 파탄과 경제적 궁핍 등으로 인하여 작품의 능력과 질도 퇴색하고 점차 작품활동도 적어진다. 「인천풍경」을 예로 들자면, 1931년 이혼하게 되자 절망과 생활고, 사회적 고립으로 인한 정신력 약화는 바로 작품으로 이어지게 된다. 생활고로 유화물감을 제대로 쓸 수 없는데다가 기량 면에서의 퇴색도 느껴진다. 이후에도 많은 작품을 제작하고 전시회도 개최하지만 기법면의 퇴보와 사람들의 냉담으로 후에는 작품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불행한 말년을 보낸다.
Ⅵ.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의 여성인권옹호
나혜석은 합리적 이성을 가진 자율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여성도 그런 인간으로 살 수 있으며 또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학교 시절부터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공부도 잘했지만, 그는 31운동 관련으로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불행 중 다행으로 반 년 감옥생활 중에 더할 수 없는 구속과 보호와 징역과 형벌을 당해 가면서라도 옷자락을 뜯어 손톱으로 편지를 써서 운동 시간에 내던지던 갖은 기묘한 일이 많았던 조그마한 경험”을 했고, “사람이 하려고 마음만 있으면 별 일이 생기지 못할 일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모(母)된 감상기(感想記)」). 이 경험은 이후 그의 생활 전체를 지배하면서 그가 자신의 생각하는 바를 추동해 나가는 힘이 되었다.
나혜석이 생각한 이상적 여성은 합리적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열정을 가진 인간이다. 나혜석은 최초로 발표한 글 「이상적 부인(理想的 婦人)」(1914.12)에서, 습관에 따라 세속적 본분인 현모양처를 이상으로 정할 것은 아니라고 했다. 나혜석이 살았던 시대 여성들에게 요구된 규범은 겨우 ‘삼종지도’를 벗어난 ‘현모양처’론이었다. 이러한 현모양처론은 여성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근대 국민의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역할을 잘 할 수 있어야 하므로 여성에게도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점에서 근대적인 것이었다.
나혜석은 생활 개량 등을 주장하는 데서 나아가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에 대해 적극적인 주장을 하게 되었다. 우선 이혼 논란을 겪고 있던 당시 기자와의 대담에서 나혜석은 ‘시험결혼’을 주장하였다.(「우애결혼시험결혼」1930.5)
이혼 후 나혜석은 두 남녀의 연애, 결혼, 이혼 과정의 보고서일 뿐만 아니라 이혼 시 아내의 재산분할권과 자식에 대한 친권행사를 인정하지 않는 제도에 대한 고발의 의미도 있는 「이혼 고백장」(1934.8~9)과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독신으로 사는 여성의 입장에서 정조와 성욕, 모성 문제를 제기한 「신생활에 들면서」(1935.2)를 발표했다. 「이혼 고백장」이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한 가정 안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만천하에 공포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일차적으로 충격을 받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정조에 대한 남녀 평등의 주장이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 이 어이한 모순이냐. 상대자의 불품행을 논할진대 자기 자신이 청백할 것이 당연한 일이거늘 남자는 명목 하에 이성과 놀고 자도 관계없다는 당당한 권리를 가졌으니 사회제도도 제도려니와 몰상식한 태도에는 웃음이 나왔나이다.(……) 아아, 남성은 평시 무사할 때는 여성이 바치는 애정을 충분히 향락하면서 한번 법률이라든가 체면이라는 형식적 속박을 받으면 어제까지의 방자하고 향락하던 자기 몸을 돌이켜 오늘의 군자가 되어 점잔을 빼는 비겁자요 횡포자가 아닌가. 우리 여성은 모두 이러한 남성을 저주하고자 하노라.
「신생활에 들면서」에서 나혜석은 한 걸음 나아가 정조란 누가 누구에게 강요할 수 없는 ‘취미’라는 주장을 폈다.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것과 같이 임의용지(任意用志)로 할 것이요,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해방은 정조의 해방부터 할 것이니 좀더 정조가 극도로 문란해가지고 다시 정조를 고수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저 파리와 같이 정조가 문란한 곳에도 정조를 고수하는 남자 여자가 있다니 그들은 이것저것 다 맛보고 난 다음에 다시 뒷걸음치는 것이다. 우리도 이것저것 다 맛보아가지고 고정(固定)해지는 것이 위험성이 없고, 순서가 아닌가 한다(「신생활에 들면서」).
나혜석이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정조를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 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음식을 좋아하느냐와 같은 ‘취향’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도 그런 성용과 취향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남녀 동등하게 정조를 지켜야 한다고 하든 동등하게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든, 사회적으로 규범화된 ‘정조 관념’은 억압성을 가진다는 것을 간파하고 정조란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취향-취미의 문제이지 규범화하여 강제할 것이 아니라고 하는 나혜석의 주장은 기성의 도덕 관념을 해체시키는 매우 선구적인 발언이다.
참고문헌
김영기(1958), 한국 여성 미술 40년사, 한국여성 문화 논총, 이화여대
동아일보(1921, 3, 18), 양화가 나혜석 여사
박명숙(1996), 나혜석의 작품에 나타난 사상연구, 대구 효성 카톨릭 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이경성(1980), 한국근대회화, 서울, 일지사
장안갤러리(1995), 나혜석의 생애와 예술
Lilian R. Furst·Peter N. Skrine, 천승걸 역(1997), 자연주의, 서울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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