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현대사] 독소전쟁사 독일과 소련 (2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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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소련-핀란드 전쟁]

[독일의 소련 침공]

[독일군의 초기 승리]

[히틀러의 계획 변경]

[모스크바 함락 시도]

[소련의 반격]

[1942년 여름의 러시아 전선]

[코카서스 방면의 독일군 진격]

[스탈린그라드의 소련군 배치]

[스탈린그라드의 소련군 승리]

[쿠르스크 전투]

[소련군 공세로 국면 전환]

[독일의 결전 태세]

[소련의 백러시아 탈환]

[바르샤바 봉기]

[동부 독일 동맹국의 항복]

[유럽의 최후 결전]

[독일의 항복]

본문내용

. 공군은 전 해의 같은 기간에 비해 40% 더 많은 항공기를 보유했고, 합성 석유 산업도 1944년 4월에 전쟁 기간을 통틀어 피크를 이루고 있었다.
[소련의 백러시아 탈환]
독일의 동부 전선은 1944년 처음 세 주 동안은 평온했다. 히틀러는 소련의 여름 공세를 확신하고 있었는데,그와 그의 군사 보좌역들은 그것이 남쪽 측면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소련군은 주력을 그곳에 집중시켰기 때문에, 독일 수뇌부는 소련군이 제정 러시아 때부터 역사적으로 눈독을 들였던 발칸 지방으로 진출할 것을 열망하고 있다고 예상했다. 중앙 집단군은 유일하게 독일군의 수중에 태반이 장악된 소련의 영토인 백러시아를 점령하고 있었다. 중앙 집단군에 대한 소련군 대응의 증강 징후가 6월에 들어 확연해 졌으나 독일군은 그것이 실제적 위협이라고 믿지 않았다. 6월 22-23일 주코프가 2개, 바실레프스키가 2개씩 지휘한 소련군의 4개 집단군은 독일군 중앙 집단군을 공격했다. 공격 지접에서 대략 병력수로 10대 1의 열세에 놓인 데다가, 히틀러가 후퇴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앙 집단군은 거의 단번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7월
3일 북동쪽과 남동쪽으로부터의 소련군 공격 부대가 백러시아의 수도인 민스크(Minsk)에서 합류할 때까지, 중앙 집단군은 전체 사단의 3분의 2를 잃었다. 그 달의 세 번째 주까지 주코프와 바실레프스키가 지휘하는 소련군은 300km를 전진했다. 소련군 사령부는 7월 17일 19명의 장성을 포함한 5만 7천명의 독일군 포로를 하루 종일 모스크바 거리를 걷게 함으로써 승리를 자축했다.
[바르샤바 봉기]
소련군의 공격은 7월 중앙 집단군의 옆구리를 찔렀다. 7월 29일 한 공격 부대는 발트 연안의 리가(Riga)에 도달했고, 독일군의 주전선으로부터 북부 집단군의 육로 접촉을 끊어 버렸다. 그달말까지 중앙 집단군의 남쪽 측면을 꿰뚫는 강력한 공격이 바르샤바로부터 비스툴라(Vistula)강의 상류 선까지 도달하였다. 바르샤바에서는 보르(Bor) 장군으로 알려진 코모로우스키(Tadeusz Komorowski)가 지휘하는 폴란드 지하 조국군이 봉기했다. 런던으로 망명한 반공적인 폴란드 망명 정부를 추종하는 이 봉기군은 며칠동안 독일군을 분산시켰다. 그러나 소련군은 비스툴라강 동안에 꼼짝않고 버티고 있었고 스탈린은 이 봉기군에게 보급 물자를 지원할 미국의 비행기가 소련 비행장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끝내는 9월 18일 110대의 B-17기가 단 한 번 비행하는 것을 허용했지만 그 때는 너무 늦었다.
독일군은 선수를 쳤고 코모로우스키는 10월 2일 항복했다. 스탈린은 소련군이 너무 약해서 바르샤바로 도강할 수 없었다고 변명했지만, 그것은 거의 사실이 아니었다. 비스툴라강 전선은 소련군이 보급을 위해 정지하는 일 없이도 광활한 전선을 전진할 수 있는 거리였다.
[동부 독일 동맹국의 항복]
소련은 바르샤바 봉기를 전략적 수순에 따라 방관하고 있었지만, 다른 곳에서는 상당한 수확을 거두었다. 8월 20일에 시작된 카르파티아(Carpathia) 산맥과 흑해에 걸친 소련군의 공격 때문에 3일 후 루마니아는 휴전 요청을 했다. 소련에 대해 선전 포고하지 않았던 불가리아는 9월 9일, 핀란드는 9월 19일 각각 항복했다. 10월 20일 소련군은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를 점령하고 티토를 수반으로 하는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소련군은 11월말까지 헝가리의 부다페스크의 문전에 도달해 있었다. 그동안 소련군의 전선은 2월부터 오데르(Oder)강에 정지된 채 머물러 있었는데, 이것은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전후 소련의 설명은 북부와 남부의 위협을 제거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1945년 2월 이후의 일련의 사건을 보면 스탈린이 영국과 미국이 평상시대로 조속히 독일을 횡단해 간다고 믿지 않았고 소련이 독일의 심장부로 향하기 전에 동부 유럽을 완전히 평정할 충분한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아이젠하워에게 다르게 말했지만, 베를린을 중요하지 않다고 간주하지는 않았다. 4월의 첫째 주에 소련군은 베를린 함락을 위한 공세에 돌입했다.
[유럽의 최후 결전]
히틀러의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마지막 희망은 4월 12일 루즈벨트가 서거함으로써 강화되었다. 그것은 소련과 서구 열강들 사이의 분열이었다. 사실 동서 연합이 긴장되기는 했으나 나치 독일에 이득을 줄 만큼의 파국은 오지 않았다. 4월 14일과 16일 공격을 개시한 미 제15군과 영 제8군은 한 주일이 지나서 포(Po)강 연안까지 이르렀다. 베를린에 대한 소련의 공세도 시작되었다. 4일 후 미 제7군은 1930년대 나치당의 본거지였던 누렘베르크(Nuremberg)를 점령했고, 소련군은 베를린에 포위망을 구출했다. 다음날 소 제5친위군과 미 제1군은 라이프치히(Leipzig) 북동부의 엘베(Elbe)강 연안의 토르가우(Torgau)에서 조우했고, 독일은 두 조각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달의 마지막 주에 영미 연합군에 대한 독일군의 저항은 사실상 중지되었으나, 소련군에 대해서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독일의 항복]
히틀러는 최후를 베를린에서 맞기로 결심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남겨진 명령 계통을 조종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그의 정치, 군사 보좌역들은 수도를 버리고 소련군의 손이 닿지 않는 남쪽이나 북쪽의 장소로 도주하는 것을 선택했다. 4월 30일 히틀러는 베를린의 벙커에서 자살했다. 그의 마지막 정치 행위는 되니츠(Karl Deoitz) 해군 원수를 그를 계승할 국가 원수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히틀러에게 충성을 바쳤던 되니츠는 항복 이외의 선택의 길이 없었다. 그의 대리인 요들(Alfred Jodl)장군은 5월 7일 일찍 라임즈(Reims)에 있는 아이젠하워의 사령부에서 독일군의 무조건 항복에 서명했다. 그때까지 벌써 이탈리아의 독일군은 5월 2일, 북부 독일, 덴마크, 네덜란드의 독일군은 5월 4일 항복했다. 미국과 영국 정부는 5월 8일을 V-E(Victory In Europe) Day로 명명했다. 완전한 무조건 항복은 소련이 참여한 가운데 베를린에서의 두번째 서명이 있은 후 자정을 지난 1분 후부터 발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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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6.07
  • 저작시기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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