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왕사지와 장항리사지를 통해 본 신라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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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천왕사지와 장항리사지를 통해 본 신라의 불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사천왕사지
 Ⅱ-1. 창건배경 및 관련설화
 Ⅱ-2. 위치적 특성
 Ⅱ-3. 가람배치양식
 Ⅱ-4. 출토 유물 (당간지주, 귀부2기, 서탑지)
Ⅲ. 장항리사지
 Ⅲ-1. 창건배경 및 관련설화
 Ⅲ-2. 위치적 특성
 Ⅲ-3. 가람배치양식
 Ⅲ-4. 출토 유물 (서탑, 동탑, 불상)
Ⅳ. 결론
Ⅴ. 참고문헌

본문내용

수 있다. 탑이 이렇게 온전히 어느 정도 중요성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탑 안에 모셔진 사리 때문이다. 불교에서 사리는 신도들에게 있어서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였고 그것이 모셔진 곳이 탑이었다.
4. 출토 유물
4-1. 서탑
1925년 도굴꾼에 의해 폭파되어 여러 조각으로 흩어져 있던 것을 1932년에 5층을 제외하고 온전히 복원하였다. 원래의 높이는 9m에 이른다. 서 탑은 이중 기단위에 5층으로 지어졌으며 첫 번째 층의 4 면 모두 중앙에 문, 자물쇠, 사자머리 문고리가 조각 되어있는데 이것은 사리를 모셔두었던 목탑의 모습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7세기 후반 신라의 탑들이 여러 개의 돌로 탑들의 각 부제가 만들어졌던 것 과 달리 장항리사지 석탑들은 모두 한 돌로 조성되어 8세기 탑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이행되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文化財大觀(경주시, 경주시 출판, 2004)
더불어서 이중기단을 사용해서 안정감을 높인 점, 5층인 층수 면에서도 탑을 높게 쌓았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3층 석탑으로 이행되어가는 과도기적 형태를 띠고 있다. 경주에서 서 탑과 같은 5층 석탑은 나원리 5층석탑 뿐이다. 「역사의 땅 경주 아름다운 전설과 함께하다」 p. 204
4-2. 동탑
동탑도 설립 당시에는 서탑과 같은 규모와 형태로 마주보게 조성되었다. 원래의 위치가 개울이랑 가까워 폭우로 골짜기가 패이면서 동탑의 축대가 무너져 탑돌이 바람에 몸돌이 깨졌다 「역사의 땅 경주 아름다운 전설과 함께하다」 p.203-204
.
그래서 탑의 1층을 제외한 각 층의 몸돌 부분들은 복원 할 수 없었으며, 계곡에 흩어져있어 지붕돌들만 모아 1966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4-3. 불상
금당으로 추측되는 위치에 남아있는 2단 석불대좌 위에 올려져있었던 불상으로, 서 탑과 마찬가지로 폭파 때 망가져 흩어져 있었던 것을 모아 복원하였으나 불상의 상반신의 일부분만이 가능하였고 무릎아래 밑 부분은 모두 소실되었다. 상반신의 경우에도 최초로 복원할 때 소실된 부분들을 시멘트로 메워 시간이 지나면서 시멘트가 빗물에 녹아 모습이 괴이해졌던 것을 다시 복원해 제 모습을 되찾았다. 현재는 국립경주 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Ⅳ.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경주의 사천왕사지와 장항리사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사천왕사지는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발전된 사찰 형식을 가지고 있는 최초의 사찰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우리는 사천왕사지를 통해 신라의 가람배치가 일탑일가람제에서 쌍탑가람제로 변하는 과정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통일 전의 신라 사찰들은 모두 금당 앞에 1기의 3층탑 또는 5층탑을 세우는 일탑일가람제를 따랐는데, 통일 이후에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탑을 세우는 쌍탑가람제로 변모되는 과정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절의 쌍탑과 가람배치양식을 통해 신라의 호국불교 성향을 확인할 수 있으며, 여러 출토 유물을 통해 통일신라시대 불교문화를 알 수 있다.
장항리사지의 경우 이 절의 위치를 통해 신라 중대의 불상 양식 등 8세기 전반에서 중엽까지의 과도기적 특징을 찾을 수 있다. 토함산 자락 남쪽에 위치하고, 동해바다로 나아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서 기존 토속신앙과 불교신앙과의 밀접한 상호관계 속에 신라중대 불상의 양식, 탑파의 형식 등 8세기 전반에서 중엽에 이르는 전환기적 특징을 찾을 수 있는 사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천왕사지보다 후에 지어진 장항리사지는 사천왕사지와 마찬가지로 쌍탑가람 양식인데, 사천왕사지와는 달리 두 탑이 목탑이 아니라 석탑으로 지어져있는 등 산지지형과 선종의 성행으로 사천왕사지와는 다른 점을 찾을 수 있다.
사천왕사지와 장항리사지는 모두 신라시대에 지어진 사찰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따라서 두 사찰 모두 신라의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사찰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먼저 사천왕사지의 경우 신라의 불국토 사상이 사찰의 위치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에 비해 장항리사지의 경우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산지 지형과 같은 자연적 요인이 사찰의 위치와 가람배치에 큰 요소로 작용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목탑이 있는 사천왕사지와는 달리 장항리사지는 석탑으로 지어졌고 절 구조 중 금당이 중앙에 세워져 가람배치의 변화가 있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불교사상이 성행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이렇듯 사천왕사지와 장항리사지의 비교 분석을 통해서 신라 불교사상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보고서에 서술했듯이 안타깝게도 두 사찰에 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장항리사지의 경우 발굴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우리는 사천왕사지를 통하여 신라의 호국불교 사상과 가람배치양식의 변화를 이해한 후 현존하는 석조유물의 예술성과 사찰의 입지 수준이 중요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앞으로 장항리사지와 통일신라시대 기타 사찰과의 영향관계를 밝혀내는 연구가 이루어야 할 것이다.
Ⅴ. 참고문헌
박성대 외 2명,「절터를 보면 풍수를 안다」, 2011
자현스님 저술, 운주사 출판, 『불교미술사상사론』, 2011
김명주,「新羅 獐項里寺址 寺刹 立地와 石造美術 연구」, 한국고대사탐구, 2010
김명주,「慶州 獐項里寺址 伽藍配置와 石造美術 硏究」,2009
윤장접,「한국의 건축」 , 서울대학교 출판부 출판, 2008
최용주 저,「역사의 땅 경주 아름다운 전설과 함께하다」, 2005
『文化財大觀』, 경주시, 경주시 출판, 2004
장충식, 『한국불교미술연구』, 시공사, 2004
강우방, 신용철 저「탑」, 2003
이영수, 『한국 옛 사찰의 남겨진 풍경들』, 눈빛 출판, 2002
郭敬淳 ,「신라 四天王寺 雙塔에 관한 연구 : 發生 背景을 중심으로」
『발굴에서 전시까지』,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경주 사천왕사지 (慶州 四天王寺址)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저술 『한,중,일 고대사지 비교연구(1) -목탑지편- 14.사천왕사지편』
문화재청, http://www.cha.go.kr
법보신문, http://www.beopbo.com/news/view.html?no=54403§io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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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6.25
  • 저작시기2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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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5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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