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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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약개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주전 135년 요한 히르카누스(John Hyrcanus(주전 135-104년)가 통치한 이후 로마에 의해 멸망하기까지의 시기를 하스모니안 왕조(Hasmonean dynasty)시기, 또는 마카비(Maccabees: “맹렬히 싸운 사람들”의 의미)시대라고 한다.
5) 로마의 지배와 헤롯 왕조
주전 63년에 다메섹에 주둔 중이던 로마의 폼페이우스(Pompeius) 장군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히르카누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으며, 통치권은 로마 제국의 손에 들어갔다. 그 후에 로마 제국의 동방 총사령관으로 알렉산드리아에 와 있던 안토니우스는 이두메의 족장이던 헤롯(Herod)을 유대의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헤롯은 유대 주민들의 반발을 억압하고 주전 37년에 예루살렘을 장악한 후 실제적인 유대의 왕이 되었고, 헤롯 왕가는 주후 6년까지 유대를 통치하였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헤롯 왕가의 인물을 간략히 살펴 보자.
- 대헤롯 : 마카비 시대의 유대왕 요한 히르카누스에 의해 정복당해 유대교를 믿도록 강요받은 이두매 족속의 후손으로 대헤롯은 유대교와 유대의 관습에 대해 정통했다. 사생활이 문란하고 성격이 잔인하여 그의 열 아내 중 두명과 세 아들과 처남과 처조부를 살해하였다. 그의 통치시기에 예수님이 탄생하였다. 그의 잔인성에 비추어 그가 예수의 탄생을 유대인의 왕의 탄생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후 베들레헴의 유아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헤롯은 유대의 대제사장 임명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하스모니안 왕가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자신의 구미에 맞는 인물을 대제사장직에 임명하였다. 그는 군대를 양성하고, 공공사업을 일으켜, 요새를 구축하였으며, 특히 유대인의 환심과 지지를 얻기위해 46년에 걸쳐 헤롯 성전(제3성전)을 건축하였다. 그는 만년에 극심한 질병으로 주전 4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에 왕국은 세 아들- 아켈라오(Archelaus), 빌립(Philip),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 - 은 로마 황제의 재가를 받아 분봉왕이 되었다.
- 아켈라오 : 그는 아구스도 로마 황제에 의해 분봉왕으로 임명되어 사마리아, 유대, 이두매를 통치하였다. 유월절 기간중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면서 3천명을 학살하였는데, 유대와 사마리아의 유력인들이 로마 황제에게 그의 포악성을 고발한 결과 주후 6년에 폐위되었다. 그이후로는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는 로마 황제가 파견하는 로마 총독이 통치하게 되었다.
- 빌립 : 이두래와 드라고닛을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북부와 동북부 지방을 통치하였다. 그는 온건하였으며, 그의 영토내에 가이사 아구스도를 기념하여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를 건설하였다. 예수께서 그 지역에 여행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헤롯 안디바 : 대헤롯과 다른 헤롯으로 불리는 그는 예수의 사역 당시에 길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이었다. 그는 아랍왕 아레다의 딸과 결혼했으나 나중에 그의 이복 동생인 헤롯 빌립(분봉왕 빌립이 아님)의 아내인 헤로디아에게 매혹되어 그의 부인과 이혼하고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하였다. 이를 책망한 세례 요한을 참수하는 악행을 범했다. 아레다 왕의 선전포고에 의한 전투에서 헤롯의 군대는 패하였고, 그후에 그의 조카인 헤롯 아그립바의 음모에 의해 오히려 Gaul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 헤롯 아그립바 1세 : 음모의 혐의를 쓰고 자기 아버지인 대헤롯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리스토불로스의 아들인 헤롯 아그립바 1세는 로마에 가서 교육을 받아 로마 황실과 교분을 맺었다. 숙부 빌립의 영토를 다스리는 분봉왕이 되었고, 헤롯 안디바를 음모로 추방하고 그의 영토까지 통치하였다. 글라우디오가 황제가 된 후에는 그의 호의로 그는 유대, 사마리아를 포함한 대헤롯이 통치하던 전 영토를 재통일하여 팔레스타인의 명실상부한 왕이 되었다. 그는 규칙적으로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열렬한 유대교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통치 기간 중에 그는 기독교를 난폭하게 박해하였으며,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처형했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기도 하였다. 그는 주후 44년에 급사하였다(행 12:20-23).
- 헤롯 아그립바 2세 : 아그립바1세는 아들 하나와 세 딸을 두었다. 그의 딸 드루실라는 유대의 로마 총독, 벨릭스와 결혼하였다(행 24:24). 아들 아그립바 2세는 주후 53년에 빌립의 영토을 얻어 분봉왕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네로 황제에 의해 갈릴리와 베뢰아도 주어졌다. 베스도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하자 그는 그의 누이동생 버니게와 함께 가이사랴에 내려가 베스도를 방문하였으며, 그때 그는 재판을 받는 바울로부터 전도를 받았다(행 25:13-26). 주후 66년 유대인의 폭동시에 그는 로마를 지지하고 유대전쟁 동안에 로마에 충성하여, 그의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다. 주후 100년에 사망하였다.
6) 유대전쟁(주후 66-70년)
유대와 사마리아를 통치하던 로마 총독들 중에 일부는 유대인들의 특수한 민족감정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주의를 기울리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유대민족을 경멸하고 억압하였다. 주후 66년에 유대인의 민족 감정이 폭발하였다. 플로루스(Florus)총독이 성전금고에서 17달란트를 부당히 강요한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이것은 성전을 모독하는 행위로서 유대인들이 강력히 반발한 것이다. 마침내 로마군과 유대인들 간에 격렬한 충돌이 일어나 플로루스는 가이사랴로 퇴각하였으며, 그후에 네로 황제의 명을 받아 동방군 총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진군해 왔다. 이때 로마와의 전쟁에서 열심당(Zealots: 셀롯당)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 황제가 죽자 황제로 추대되어 로마로 갔으나, 그의 아들 디도(Titus)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주후 70년 9월에 예루살렘 성을 함락하고 성전을 소실시켰다. 유대전쟁 결과 성전이 소멸되자 성전 중심의 신앙인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는 중대한 변화가 생겨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후에 예루살렘 성전의 터 위에 쥬피터 신전이 세워짐으로 유대인의 거룩한 성은 완전히 이방인의 도시가 된 것이다.
http://cafe.daum.net/Bia/MzzC/32
  • 가격2,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8.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8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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