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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과 증거 등을 고려할 때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였던 경찰과 이승만, 그리고 미군정은 여운형 암살의 배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운형은 암살당했고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그 정부의 수반에 이승만이 앉게 되었다. 이승만은 군대보다는 경찰을 신뢰하였고 그 경찰 내에는 수많은 친일파들이 그대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역사 속에 부정적인 모습만으로 영원히 기억되겠지만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암살당한 여운형은 다르다. 여운형은 사라졌지만 그의 통일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활동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남북을 오가며 그가 기울였던 노력 또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여운형 암살의 배후는 앞으로 더 밝혀져야 할 것이 적지 않지만, 그가 암살당한 1947년 7월 19일 이후 미소공위의 파탄은 확실해졌고, 단정의 길이 확고해짐에 따라 이승만과 미군정의 관계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7월 27일의 민전 주최 ‘공위경축 임시정부수립촉진 인민대회’를 계기로 미군정은 좌익을 제거하는 데 전면에 나서게 된다. 좌우합작은 여운형의 죽음으로써 사실상 종언을 고하고, 미소공위의 파탄은 바로 UN으로의 한국문제 이관의 절차를 밝아 단정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여운형은 암살당했고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그 정부의 수반에 이승만이 앉게 되었다. 이승만은 군대보다는 경찰을 신뢰하였고 그 경찰 내에는 수많은 친일파들이 그대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역사 속에 부정적인 모습만으로 영원히 기억되겠지만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암살당한 여운형은 다르다. 여운형은 사라졌지만 그의 통일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활동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남북을 오가며 그가 기울였던 노력 또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여운형 암살의 배후는 앞으로 더 밝혀져야 할 것이 적지 않지만, 그가 암살당한 1947년 7월 19일 이후 미소공위의 파탄은 확실해졌고, 단정의 길이 확고해짐에 따라 이승만과 미군정의 관계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7월 27일의 민전 주최 ‘공위경축 임시정부수립촉진 인민대회’를 계기로 미군정은 좌익을 제거하는 데 전면에 나서게 된다. 좌우합작은 여운형의 죽음으로써 사실상 종언을 고하고, 미소공위의 파탄은 바로 UN으로의 한국문제 이관의 절차를 밝아 단정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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