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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영화, 영화무역, 공포영화, 한국영화, 친일영화, 구로사와아키라]일본영화와 영화무역, 일본영화와 공포영화, 일본영화와 한국영화, 일본영화와 친일영화, 일본영화와 구로사와아키라, 일본영화와 식민지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일본영화와 영화무역
1. 영화관 입장자수와 지상파 텔레비젼의 출현
2. 영화산업에 미치는 영화보조창구의 역할 : 일본과 미국의 케이블 텔레비젼, 위성방송, 영화채널의 보급률 비교
3. 홈비디오 대여 및 판매

Ⅲ. 일본영화와 공포영화

Ⅳ. 일본영화와 한국영화

Ⅴ. 일본영화와 친일영화

Ⅵ. 일본영화와 구로사와아키라

Ⅶ. 일본영화와 식민지

참고문헌

본문내용

경우에는 미국 직할 식민지인터라 타국과는 다르게 할리우드의 영향이 매우 컸다. 이 영향으로 뮤지컬과 멜로드라마가 1930년대에 이미 발달했고, 미국의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마닐라를 아시아의 할리우드로 만들려는 계획도 있었다. 일본군은 여기서도 포로를 강제로 영화에 출연시켰다. 그 작품으로 아케 유타카와 제럴드 드 레온이 공동으로 만든 ‘저 깃발을 무찔러라’가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한국에서 제작된 최초의 영화는 1919년 김도산의 ‘의리적구투’이다. 이 영화는 일본의 연쇄극 형식의 영향을 따랐다. 이후에도 신파의 영향은 한국영화에 큰 부분을 차지하였다. 해방이후에도 계속해서 이러한 영향을 미친 것은 일본식 신파가 아닌 판소리와 유행가와 맞물린 한국의 멜로드라마적 상상력으로 영화의 한 부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일본이 대만에서처럼 쉽게 영화산업을 장악하지 못했다. 총독부에서는 교육계몽영화를 계획하여 윤백남의 ‘월하의 맹세’를 만들지만 그 이상으로 민간에서의 영화제작이 이루어졌고, 1924년 일본인이 조선키네마를 설립하면 이에 대항하여 한국인들이 독립제작사를 수도 없이 설립하였다.
이러한 민간의 영화제작 붐은 바로 한국영화의 황금기로 이어진다. 1920년 신화를 일으킨 나운규의 ‘아리랑’을 시작으로 이경손의 ‘장한몽’, 이규환의 ‘임자없는 나룻배’등으로 계속해서 이어진다. 하지만 이런 영화들의 다분히 항일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일본영화의 형식을 모방했다는 한계점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일본에서 신파영화의 유행과 경향영화의 유행을 그대로 따랐음이 그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일본의 시대극만큼은 한국에서 발달하지 못했다. 또한 최초의 토키작품은 일본보다 다소 늦은 1935년 이명우의 ‘춘향전’으로 나타났다.
1930년대 후반에도 방한준, 윤달춘 등의 2세대 감독들의 활발한 활동이 있었으나 일본의 군국주의의 길을 선택하면서 양상이 달라진다. 영화법의 제정으로 한국인이 주체적으로 영화에 관여할 길이 막힌 것이다. 이러한 관계로 인해 어린이의 세계를 다루는 영화들만이 검열을 통과할 수 있게 되어 최인규의 ‘수업료’, ‘집없는 천사’ 등이 탄생되었다. 결국 1942년에는 모든 영화사가 폐쇄되고, 총독부는 조선영화사(약칭 조영)를 설립하게 된다. 일본의 영화인들이 와서 한국인을 현지스태프로 쓰는 형태의 영화제작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허영의 ‘너와 나’, 도요타시로의 ‘젊은 모습’, 이마이 다다사의 ‘망루의 결사대’ 등이 이 때의 작품이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곧 한국어 영화의 제작 붐이 일기 시작하여 최인규의 ‘자유만세’ 등이 제작되었으며, 북한에서는 강홍식의 ’우리고향‘이 최초의 영화가 되었다. 이후 한국은 1998년까지 일본영화의 상영을 금지하였다.
하지만 일본영화의 영향은 수없는 리메이크 작품을 통해서 크게 미쳐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일본의 영화계에서는 재일 한국인 배우나 스타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 아직도 일본 각 시대의 미남미녀의 기준이 재일 한국인 배우나 스타에 의해 결정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참고문헌
구견서(2005) / 일본식민지의 영화와 시대성, 한국일본학회
유양근(2010) / 전쟁기 일본영화와 일본인의 자기 인식,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이상우(2002) / 1940년대 이후 일본과 미국사이의 영화 무역, 한국언론학회
정수완(2001) / 전후 일본영화와 한국영화의 비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조혜정(2009) / 친일영화에 새겨진 친일담론의 양상과 국민통합 이데올로기 연구,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코헤이 카와사키 외 1명(2008) / 인간이 아닌 인간 : 일본 공포 영화와 공포 만화의 가능성,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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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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