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가 남한산성으로 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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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간 까닭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본문
1. 역사
(1) 남한산성의 역사
1)삼국시대
2)고려시대
3)조선 시대
4)일제 시대 및 해방 이후
(2) 강화도의 역사
1)삼국시대
2)고려시대
3)조선시대
2. 성곽
(1)성곽의 정의
(2)성곽의 구성요소
(3) 남한산성 vs 강화도의 성곽 비교
3. 우리의 가설
(1)병자호란
(2)시대적 배경 및 정치적 배경에서 본 이유
(3)성곽의 특성 때문?

Ⅲ. 결론

본문내용

는 조금 더 깊이 가설을 세워 보았다.
첫 번째로 인조는 전쟁이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을 것이고 자신이 직접 수모를 겪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결사 항전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인조는 잠시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후 적과 대치하며 임금을 구하려는 근왕군을 기다리려 하였지만 끝내 근왕군은 오지 않았고 산성에 갇혀 고군 분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척화파와 주화파의 정치적인 세력싸움의 결과 인조는 적절한 선택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 인조의 정치적 배경은 그가 서인에 의한 인조 반정으로 왕위를 오른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왕으로써의 권위는 거의 전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척화파와 주전파의 생각에는 나라의 안위보다 척화와 주전의 결정이 자신들의 권력의 유지와 관계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실패하기만을 바랬을 것이다.
(3)성곽의 특성 때문?
인조가 남한산성을 택했던 또 다른 이유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남한산성의 특성이다. 남한산성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인조 즉위 직후 2년여에 걸쳐 남한산성을 축성한다. 당연히 당시로서는 최신기술이 적용되었고, 이는 산성의 방어력에 믿음을 주었을 것이다. 다른 이유로는 방어력의 근원이다. 강화도는 성곽이 전체를 보호하지 못한다. 몇몇 거점에 포대를 설치하고 포격으로 선박의 접근을 차단해 내부의 안전을 확보한다. 거점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고, 일단 적선이 상륙에 성공하면 포대는 이곳을 공격하지 못하는데다가 지속적으로 방어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자원이 소모된다. 7년간의 임진왜란에 이어 정묘호란까지 겪은 조선은 그만한 지원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남한산성은 지역 전체를 성곽으로 둘러 방어한다. 가만히 있어도 어느 정도의 방어력이 보장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병 중심이었을 추격대를 피하기 위해서는 기동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당시 성곽에 대한 공격은 화포보다는 백병전이 주를 이루는 시기였으므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맹이나 나뭇가지만으로도 어느 정도 방어력 확보가 가능하다.
추격을 피하기에는 여유가 없는 시간과 거리, 최신 축성술을 적용한 성곽에 대한 믿음, 부족한 자원으로 방어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인조는 강화도행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을 택하지 않았을까 한다.
Ⅲ. 결론
병자호란을 패배의 역사로만 보지 말자는 견해도 있다. 당시의 군세와 힘의 역학관계로 보아서 45일간의 남한산성 수성은 단순한 패배 이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에 자리한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를 보면서 우리 역사의 아픈 과거에 대한 그만하면 잘했다 식의 ‘감싸주기’ 보다는 ‘비판적 되새기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역사를 기록하는 이유는 인류가 살아온 행적을 기록한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 현재와 미래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전문가에 의한 역사 이면의 진실 보기가 필요하며, 역사에 대한 일반인의 다각적 분석 또한 의미 있는 일이다.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배금 친명책을 주장하였던 서인들의 기세에 눌려 인조 역시 국제적 감각이 결여된 선택을 하였다. 그렇다면 조금 더 치밀한 작전을 펼치고 청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관찰하였어야 했다. 청의 빠른 진격을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세자빈과 원손,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황급히 강화도로 보내고 자신과 소현세자는 남한 산성으로 피란을 갔다. 피란의 시작부터 믿음이 갈 수 없는 결정이었다. 삼전도의 굴욕은 예고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상의 이유 때문에 인조가 남한 산성으로 피란을 갔다고 하지만 한 나라의 국왕이 자신의 궁궐을 두고 움직였을 때는 그럴 듯한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인조 즉위 직후 2년 동안 남한 산성을 축조하였기에 남한 산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을 것이고 부족한 자원으로 버티기에는 계속적인 자원공급이 필요한 강화도보다는 낫다는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산성 밖에서는 백성들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 이어졌고 산성 내에서도 임금의 생활은 비참하였지만 청군에 의해 직접적인 함락을 당하지는 않았다. 오랜 호란의 결과 더 이상 전세의 역전이 불가함을 깨닫고 주화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남한 산성을 나서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남한 산성은...
현재 남한 산성은 과거와 같은 최후의 보루지는 아니지만 역사적인 존재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서울경기 지역의 시민들에게 도립 공원으로서 훌륭한 이용 가치가 있음을 인정받고 있다. 남한 산성은 소나무 숲을 비롯한 갖가지 나무와 곤충, 조류, 야생화, 야생 동물들로 좋은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남한 산성을 답사하면서 그 신선한 공기와 아름다운 식생을 보면서 진작에 찾지 못했음을 아쉬워했다. 그런데 남한산성의 역사관을 중심으로 퍼져 있는 위락 시설을 보면서 조금 더 그 모습을 감출 수 있다면 남한산성은 유럽의 어느 성곽 못지 않게 아름다운 관광지로 각광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얼마 전 남한산성 행궁(行宮임금이 궁궐 밖에서 임시거처로 사용하는 별궁)이 3년간에 걸친 복원공사 끝에 옛 모습대로 복원됐다한다. 남한 산성의 역사를 기억하며 현재의 남한 산성을 역사의 교육현장이자 시민들에게 휴식의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보존복구 작업이 지속되었으면 한다.
<참고 문헌 및 참고 인터넷 사이트>
홍성암, 대하역사소설「남한산성-인조반정1,2」, 서울:太學社, 1992
이경수, 「역사의 섬, 강화도」, 서울 : 신서원, 2002
박현숙, 「백제 이야기」, 서울: 대한 교과서, 1999
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서울의 산」, 1992년
김재일, 「생태기행 수도권편」, 서울 : 당대, 2001
http://myhome.naver.com/namguana(성곽에 대한 조사)
http://www.namhansansung.or.kr(남한 산성에 대한 조사)
http://binin.netian.com/horan.htm(병자호란)
http://www.ganghwaro.com(강화도)
http://www.ocp.go.kr(문화재청)
http://www.naver.com(두산 엔사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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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0.19
  • 저작시기2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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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86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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