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운동사] 조선 공산당 - 사회주의 이념 도입과 확산, 공산주의, 조선공산당 조직과 활동 및 정치노선, 조선공산당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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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민족운동사] 조선 공산당 - 사회주의 이념 도입과 확산, 공산주의, 조선공산당 조직과 활동 및 정치노선, 조선공산당의 해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사회주의 이념 도입과 확산
 (1) 사회주의이념 수용·확산의 여러 계기
 (2) 해외 한인들의 사회주의이념 수용
 (3) 사회주의이념의 국내 확산

3. 조선공산당 조직과 활동
 (1) 창당준비과정
 (2) 제 1, 2차 조직과 활동
 (3) 제 3, 4차 조직과 활동

4.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

5. 조선공산당의 해체

6.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달성하는 과정에서는 우선 소작료를 3할 이내로 내리고 지주와 대토지소유자에 대한 농민의 투쟁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당면목표로 삼았다. 강만길, 127쪽.
코민테른에 제출할 국내정세보고는 노동자농민계급의 동맹과 함께 농업혁명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경우 농업혁명이 바로 토지혁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토지의 몰수를 주장한 것은 이전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서중석, 「해방후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국가건설운동 연구」,서울대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0
민족해방운동에 관한 논강에서도 일본제국주의와 봉건유제에 대한 혁명적 운동의 불가분성이 인식되고 사회혁명으로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제창하였지만 역시 그것을 토지개혁 또는 토지혁명과 연결시키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12월테제」는 토지혁명을 제시했다.
5. 조선공산당의 해체
「12월테제」가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은 아니었다. 코민테른 기관에서 정식으로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결의했다는 기록도 없다. 「12월테제」가 조선공산당의 재조직을 지시한 것은 조선공산당을 코민테른 지부로서 인정하는 것을 사실상 철회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시한 것이었고, 또 누구나 「12월테제」를 조선공산당의 사실상의 해체지시로 받아들였다.
「12월테제」가 발표되고 조선에 전달될 쯤에 조선공산당은 수차례의 검거사태로 사실상 해체된 상태에 있었다. 조선공산당의 해외조직인 만주총국과 일본총국도 1930∼31년경에 일국일당원칙에 입각하여 해체선언을 발표하고 중국과 일본의 조직에 편입되고 말았다[미주 34]. 이리하여 조선공산당은 새로운 방침에 입각하여 당 재건을 시도하는 단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조선공산당은 왜 새로운 방침에 의한 재조직지시를 받게 되었는지, 즉 조선공산당의 약점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본다.
「12월테제」는 조선공산당의 첫번째 과제가 그 자신의 대열을 강화하는 데 있다고 하고 “사회주의적 소부르주아 지식인으로 당을 구성한 점과 노동자와의 연대가 부족했던 점은 이제까지 조선공산당이 가지고 있는 영구적인 위기의 주원인이었다”고 진단했다. 이 문제는 파벌투쟁의 문제와 함께 누차 지적되어왔던 것이다.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검거된 당원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적어도 60퍼센트 이상이 계급적으로 소부르주아 출신이다. 또한 절반 이상은 중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었다. 20대의 당원들이 75퍼센트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95퍼센트가 40세 이하였다. 이상의 조사를 두고 볼 때 조선공산당 당원들은 부유하지는 못하나 평균적인 한국인으로부터 뚜렷이 구별될 정도의 고등교육을 받았고, 적어도 잠재적일지라도 정치엘리트로 규정될 수 있는 도시화된 소지식인 청년들이었다.
특히 공산당원 중 신문기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제1,2차 조선공산당 검거 시에 언론관계자가 83명이었는데 조선일보 관계자만 해도 30명에 달했다.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2,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447쪽.
이는 당시 상황에서 신문사가 전국적인 지국조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연락이 편리했고 합법적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이었으므로 활동가들이 적극적으로 진출한 결과였다. 이는 인텔리들이 당원의 다수를 차지했던 점의 한 반영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당원구성의 계급적 취약성 등 문제점들은 초기단계에서 특히 식민지 민족해방운동과정에서 으레 나타나는 양상으로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도 근원이 있었다. 1920년대 말까지도 노동자들의 수는 많지 않았으며 노농대중들은 봉건적인 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일천한 사회주의운동의 역사로 경험이 풍부한 활동가들이 부족했으며, 수년 동안의 집중적인 운동경험도 수차례의 대규모 검거사건으로 강제적인 단절을 면할 수 없었다. 실천의 경험은 적었고 당의 운영은 탄압 앞에서 비민주적으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점들은 무분별한 파벌투쟁의 폐해들이 온존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조선공산당의 이러한 치명적인 약점들을 주체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은 결국에는 당 재건운동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당 재건운동과정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에게 한층 더 높은 용기와 간난을 요구했다.
6. 맺음말
이상으로 사회주의의 수용과 조선공산당에 대하여 조사해 보았다.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으며 사회주의의 이념을 수용하면서 성격이 급격하게 변화된 우리나라의 20~40년대의 사회모습을 알게 되었다.
조선공산당은 4차례에 걸친 일제의 혹심한 탄압을 받아 거듭 무너졌지만, 그때마다 당을 다시 만들어 일제에 맞섰다. 조선공산당은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가장 커다란 장애중의 하나였던 파벌주의를 극복하고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을 단일한 지도아래 편성하였다는 점과 그를 기반으로 대중조직의 역량 강화와 박종린,「1920년대 ‘통일’조선공산당의 결성과정」,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1998, 257쪽.
그들은 계급해방과 민족해방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시켜 새로운 독립국가인 민주공화국 또는 인민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노동운동·농민운동 등 여러 부문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원들은 지식인이 더 많았는데 이것은 당을 처음 만들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아직 조선 노동계급이 크게 성장하지 못했음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전국 운동을 지도할 튼튼한 조직으로 조선공산당을 만들려 했지만, 일제의 탄압을 뚫고 대중에게 튼튼하게 뿌리박지는 못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의 독립을 위한 노력의 뜻은 결코 해체되지 않을 것이다.
참고문헌
역사연구소 지음, 『함께 보는 한국 근현대사』, 서해문집, 2004.
한국역사연구회엮음, 『한국역사입문③』, 풀빛, 1996.
고숙화외,『헌국사』49, 국사편찬위원회, 2001.
장만길 외 공저,『한국사』15, 한길사, 1995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2,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이수천, 「1920년대 조선공산당의 민족 협동전선론」,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1999.
이덕일, 「일제하 조선공산당과 소련과의 관계」, 숭실대학교 대학원, 1993.
박철화,「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단체 연구」, 숭실대대학원,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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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19
  • 저작시기2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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