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의 몰락 배경과 과정 (정치적, 사회경제적, 사상적 배경, 고려왕조, 고려멸망,원인, 과정, 고려사,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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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왕조의 몰락 배경과 과정 (정치적, 사회경제적, 사상적 배경, 고려왕조, 고려멸망,원인, 과정, 고려사,쇠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몰락의 배경
 1. 정치적 배경
 2. 사회경제적 배경
 3. 사상적 배경

Ⅱ. 몰락 과정
 1. 위화도회군과 이성계의 집권
 2. 고려왕조의 종언

참고자료

본문내용

황에서 창왕 원년 11월 김저사건이 발생하여 정국은 다시 커다란 파동을 겪는다. 이번 문제가 된 김저사건이란 최영의 생질이며 전대호군인 김저와 역시 최영의 족당인전부령 정득후가 강화로부터 황려에 옮겨와 있던 우왕을 찾아보았을 때 왕이 울면서 “울분 속에 이곳에서 지내자니 견디기 어렵다. 가만히 있다가 죽음에 나가느니보다 한 역사를 얻어 이성계를 살해하면 내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본래부터 예의판서 곽충보와 사이가 좋았으니 그대들은 가서 만나보고 도모하라”고 하며 칼 한 자루를 보낸데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전왕의 지시대로 하였으나 곽충보가 이 사실을 이성계에게 밀고함으로써 정득후는 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김저는 옥에 갇혀 공모자들을 자백하여 이들은 모두 강릉부로 내쫓겼다. 이어 이성계는 우·창은 본래 왕씨가 아니므로 종사를 받들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 신종의 7대손인 정창군 요를 새 국왕으로 세우자고 제안하였다. 결국 정창군 요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고 창왕은 폐하여 강화로 방축하였다.
이렇듯 이성계는 인척관계에 있으면서 조준이 지적한 바와 같이 치국을 잘 모르는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공양왕을 추대하여 새 국왕으로 세움으로써 이성계와 그 일파는 자신들의 위치를 한층 확고히 할 수 있었다.
2. 고려왕조의 종언
공양왕의 직위 후 이성계 일파는 계속하여 세족·권문을 비롯한 자기네 반대파의 탄핵·제거에 열을 올렸다. 그들은 난국속에서도 끈질기게 추진해 온 사전·농장 혁파 문제를 마무리지어 같은 해 9월에 공사의 전적을 수도의 시가에 모아 불태움으로써 구가세족의 경제기반을 무너뜨렸다.
그 후 이성계 일파는 군제 개혁에 착수하여 여러 원수의 인장을 거두어들이는 등 준비작업을 서두르더니 마침내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하고는 이성계 자신이 삼군도총제사를 맡아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던 중 공양왕 4년 3월에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세자 석을 맞으러 황주로 떠났던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 떨어져 중상을 입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호기를 잡은 정몽주는 이성계 측군의 유배를 도모하였고 이방원은 이 사태를 이성계에게 알리고 같이 개경으로 돌아왔다. 정몽주는 동태를 살피기 위해 이성계의 병문안을 갔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회유해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하였고 돌아가는길에 선죽교에서 격살당하였다.
이렇게 정몽주를 제거하여 아무 거리낄 것이 없게 된 이성계 일파는 조정을 자기네 세력 일색으로 채우고 방해요소들을 모두 제거했다. 그리곤 7월에 우시중을 맡고 있던 배극렴등이 공민왕비인 정비에게 지금 왕은 정사에 어두울뿐더러 덕이 없어 인주로 삼을 수가 없다고 아뢰고 그의 교를 받는 형식을 빌어서 공양왕을 폐하여 원주로 방축하였다. 며칠 후 이성계가 개경 수창궁에서 새 국왕으로 즉위한다.
이로써 고려왕조는 34왕 475년만에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참고자료
- 박종기,『새로 쓴 5백년 고려사』, 푸른역사, 2008.
- 고려시대사 | 박용운 | 일지사 2008
- 안정희, 「이야기 고려왕조 오백년사」, 청솔,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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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11.10
  • 저작시기20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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