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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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훈민정음 -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누구에게나 때때로 돌아볼 수 있는 시간에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 있을 것이다.
② 사람들에게는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살피는 시간에는, 사회에 대한 의문으로 확장한다.

본문내용

곡림(哭臨)하였다.
문종 1권 즉위년 2월 23일
조전(朝奠)에 왕세자(王世子)가 종친(宗親)과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서 성복(成服) 을 하고는 곡림(哭臨)하였다.
문종 1권 즉위년 2월 23일 (정유) 002 / 임금이 빈전 밖에서 즉위의 예식을 행하다
임금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널[柩] 앞에서 유명(遺命)을 받고 빈전(殯殿) 문밖의 장전(帳殿)
에 나가서 즉위(卽位)의 예식(禮式)을 행하였는데, 의식대로 하였다. 슬피 울면서 스스로 견디지 못하니 옷 소매가 다 젖었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벗고 상복(喪服)을 다시 입었다.
- 문무백관을 비롯한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였다.
문종 1권 즉위년 3월 13일
허후(許?)정인지(鄭麟趾)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역대(歷代)에 세종(世宗)이라고 일컬었던 군주(君主)는 혹은 중흥(中興)하였기 때문이거나 혹은 창업(創業)하였기 때문이었는데, 대행 대왕(大行大王)은 이와 같지 않은데도 세종(世
宗)이라고 일컫게 되면 덕행(德行)을 기록하는 뜻에 결점(缺點)이 있어서 역대(歷代) 칭호(稱號)의 뜻과 같지 않습니다. 청컨대 문종(文宗)이라고 고쳐서 실제의 덕행을 기록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칭호는 세종(世宗)이라고 하지마는, 선왕(先王)의 덕행은 누가 이를 알지 못하겠는가? 더구나 북방(北方)에서 공훈(功勳)이 있었으니, 세종(世宗)이라고 일컫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하였다.
- 칭호가 덕행을 후대에 전하는 데에 부족함이 있지 않는지 우려하는 한 신하에 대해 문종은 칭호가 그러할지라도 덕행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해질 것이라고 답하였다.
세종대왕 즉위년부터 실록의 사건들을 살펴보았는데, 마지막 보고서로 승하년의 일지를 자세히 읽어보게 되었다. 이름은 도, 자는 원정인 세종 그는 지금까지 전제군주, 현재의 행정부 총책임자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된다. 상징적인 예로 독립투사, 황금기를 이끌던 조상 등 역사 속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화폐에 등장하고,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대왕의 칭호로 후대인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진흥왕, 무왕, 장수왕, 고려태조 등도 당대에서는 대왕일 수는 있지만 후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의 서론의 의문이다. ‘지금 사회가 앞으로 속하기에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가. 현재의 모습은 어떤가’
인간의 의식 성장이 감당할 만큼 이상으로 급히 변하고 있는 세상은 가치의 혼돈을 불러왔고 그 사회 속에서 사회화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는 어려워지고 있다. 더 복합적인 요인들을 고려해야 하는 만큼 그 해답을 구하는 여러 시도가 있는데, 인간이 그동안 가장 많이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과거사례에의 고찰을 통해 답을 찾는 법이 있다.
세종대의 시기에도 큰 홍수를 비롯한 자연재해와 그에 따른 흉년, 집권초기 활발했던 왜구활동, 힘겨운 백성들의 생활에 부담을 가중시켰던 외교를 위한 조세 등의 요인들을 보았을 때 기후와 풍년 여부에 영향을 받아 때로 태평성대기로 불렸던 때와는 차이가 있다. 당시가 그렇게 불렸던 이유가 무엇인가 찾기 위해 첫 번째로 당대의 정치를, 그리고 성대를 이끈 군주였던 세종의 정치에 대해 연구하며 현재를 위한 해결방안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상피제, 즉 수령임기제는 보통 30개월을 임기로 하여 수령의 부정의 가능성을 막고자 한다.
민주주의가 반민주적인 사상을 억누르고자 국가보안법을 필요로 했는데, 이것이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에 역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강의를 통해 배운 노토에 필기된 내용이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가 반민주적 사상 견제를 위해 국가보안법을 필요로 했는데 이것이 오히여 민주주의에 역행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세종이 사회의 질서의 안정적 유지를 위하나, 때로 백성들에게는 억압이 되는 유교이념, 맹자의 왕도정치에 영향을 받은 역성혁명 정당화하는 이 유교이념에서의 율을 백성들에게 적용함에 어떤 유연함을 두었는지 참고함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유교이념은 당시에도 민주주의에 상응할 만한 주도적인 가치로, 큰 영향력을 가진 민감한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토지문제에 따른 경제적 혼란을 극복하지 못해 쇠퇴한 고려의 전례를 알고, 조선의 토지 개혁을 추진했던 예도 있다. 토지문제는 현재의 문제이기도 하다.
유교와 불교와 같은 상이한 사상으로 대립이 일어날 수 있는 두 세력에 대해 어떻게 조정을
하였는지, 국가경영을 위해 집현전을 어떻게 이용하였는지, 구민고소 금지법에 관련된 딜레바, 고민에 대한 대처 모습을 비롯해서 여러 사항에 대해 어떤 모습으로 판단하였는지 그 방법과 문제상황에 대해 유연하게 대처한 한 시대를 살았던 위대한 정치가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주목했던 것을 이들이 아니었다. 내가 실록을 읽으며 보기를 바랬던 것은, 마상정치라고 불렸던 태조, 태종의 뒤를 이어 인본의 정치로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 중흥기를 열었던 권위 있는 군주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세종이었다. 그래서 실록을 읽어나갈 때에도 세종의 인간적인 면에 중점을 두어 일지 중 취사선택하여 관심 사건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그의 학구열과 백성을 걱정하는 모습, 경로연을 열고, 신하들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 하나가 된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정치를 이끌어 나가고, 형 양녕과 아버지 태종을 대하는 모습과 나이든 신하의 퇴직의 청에 대한 대화 등이었다.
그리고 그 인간적인 면은 오랜 세월 함께 한 대신 중 한명인 허조가 세종의 선정이 기쁘고, 나의 역할은 다했다며 웃으며 숨을 거두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으로 하나의 감동으로 영향을 주었다. 진정한 정치를 한다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하였던 것이다.
그동안 실록이라고 하면 상당히 멀게 느껴졌었지만 이 강의를 통해 처음 접해본 실제 실록은 때로 흥미 또한 일으키는 기록이 등장하여 매주 레포트 작성을 마치고 나면 보람이 남았습니다. 역사에 대한 지식이 한정되어 있었던 저에게, 역사를 인식하는 새로운 사고법을 이 강의에서 학우들의 토론과 더불어 교수님의 의견을 들으며 배워나갈 수 있었던 것 또한 보람이 남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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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6.01.16
  • 저작시기2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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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9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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