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의 남해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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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화의 남해원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정화의 생애
시대적 배경
제1차~7차 원정기
일정
<물류&전략&국제 경영적 관점>
정화의 남해원정의 결과 & 의의
참고문헌

본문내용

수, 반정수, 수수, 민초 등이었다. 승무원 중이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항해사로 그는 해도를 읽고 나침반을 조작해 배의 진로를 결정했다. 항해사의 판단과 지시에 따라 타를 잡는 것이 조타수, 정박할 때 닻을 다룬 것이 반정수였다. 수수와 민초는 돛을 올리고 내리는 일 등에 종사했다. 이렇게 전문적으로 배의 운항에 종사하는 구성원 외에 많은 병사들이 그 일을 분담했다. 특이한 점은 음양관과 음양생이 함대에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기후의 변화를 예측하는 역할을 했다. 또 철묘와, 탑재당은 항해 중에 배를 수리하고 보수하는 일에 조사했다. 여러 지역에서 무역을 담당하고 적재한 화물 관리에 종사한 것이 호부 낭중을 비롯한 실무 관료였다. 호부 낭중은 적재된 방대한 양의 화물과 식료를 관리하고 무역 사무에 종사했으며, 통사는 교섭, 매변은 무역 실무에 종사하고, 서산수는 화물의 기록과 서류 정리를 담당하는 출납 책임자였다. 사인의 임무는 분명하지 않지만, 군공 따위를 기록한 듯하다.
함대의 의장과 군사를 담당한 군단이 있었고, 이 가운데 기수, 악대 등 제국의 사절로서 위엄을 세우는 역할도 있었다. 또한 함대에 180명이나 되는 의관과 의사가 탑승하고 있었던 것도 주목된다. 의료에 종사하는 승무원의 수는 승무원 약 150명의 한 꼴이었는데, 의료 관계 승무원이 많은 이유는 항해 중에 병에 걸리는 병사가 많고, 여러 함선에 의관을 분승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함대의 크기
정화 함대는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거대한 목조선이었다. 함대의 중심은 대형 함선 60여 척이었고, 대형 함선만으로는 항해가 불가능해 그 주위에 100척 정도의 소선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함대의 중심을 이루는 거함은 보선이라고 불렸는데, 서양보선, 서양취보선이라고도 불렸다. 이것의 의미는 보물을 가지러 가는 배이며, 각지의 지배자가 황제에게 헌상하는 화물이 탑재된 데서 연유한다.
국제 경영적 관점
정화의 함대의 규모는 지나치게 거대했다. 정화 함대는 전투, 탐험 등의 실제적인 목적을 추구한 함대로는 지극히 비효율적이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정화 함대가 명나라의 위용을 바다의 세계에 과시하고 명나라에 조공을 요구하는 조공 무역(속국(屬國)이나 제후(諸侯)가 종주국(宗主國)에 공물(貢物)을 바침으로써 이루어지는 물물의 교역(交易) 관계)의 성격을 가진 의례적인 목적으로 편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정화의 함대는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 가마, 마젤란 등과는 달리, 세계 각지에서 귀중한 물건들을 실어왔을 뿐, 당장 경제적으로 가치가 높은 물자를 가지고 돌아오진 않았다. 가지고 온 물건들을 다른 나라에 파는 이중 무역을 행했으면 엄청난 이익을 가져왔겠지만 그러한 기록은 없다. 그에 비해 대규모 원정을 위해 들어가는 비용은 엄청났다고 한다.
정화의 남해원정 한계
정화의 원정은 조공 무역으로 치자면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원정에 들어간 막대한 비용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들이다. 즉 화려한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지만 한편으로는 막대한 재정 손실을 감내 하여야 했다. 3차 항해를 마무리 할 때까지 무려 600만 냥의 은을 소모했다. 심각한 재정 출혈을 우려한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락제의 남해원정이 지속 된 이유는 세 가지이다.
1. 건문제의 행방을 쫓기 위하여.
2. 많은 국가에 조공을 받아 황제의 덕을 과시함으로써, 찬탈자라는 결점을 감추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3. 남방과 우호 관계를 맺음으로 남북(몽고) 양쪽에서 적으로 둘러싸일지도 모르는 곤경을 벗어나기 위하여.
즉, 영락제가 지시한 정화의 남해원정(1405)은 신항로를 개척하여 인도나 중국의 새로운 시장을 확보하여 지중해라는 좁은 교역시장에서 벗어나 더 큰 시장에서 더 큰 이익을 창출하려 했던 서양의 콜럼버스(1492, 아메리카 발견), 바스코 다 가마(1498, 인동로의 신항로 발견)등의 목적과는 완전히 달랐다. 정화의 원정은 실익보단 중화주의라는 중국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오히려 물질적 손해를 보았지만 명나라가 세계질서를 이끌어 나가는 종주국이며, 전쟁 없이 세계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자부심(중화주의)의 표현이였다. 이러한 동서양의 의식차이가 서양보다 100여년 앞선 항해술을 가졌던 동양의 역사적 발달의 차이를 나타내게 되었다.
정화의 남해원정의 결과 & 의의
정화의 남해원정의 의의는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세계적 관점에서의 인식의 변화를 들 수 있다. 대부분 대항해 시대라고 하면 유럽의 바스코 다 가마에서 시작해 콜럼버스 등 대부분 유럽에서의 활동만을 집중을 했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볼 때 정화의 남해원정이 약 60년 정도 빨리 나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식과는 다르게 대항해 시대의 시초는 정화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항해 도중에 쓴 책들이 동방견문록과 같이 유럽인들이 동방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계기도 만들었다는 의의도 있다.
두 번째는 물류적 관점에서의 인식이다. 명나라는 35년간에 걸친 남해원정 동안에는 세계적 강대국으로 불릴 정도로 위상이 대단히 높았다. 하지만 남해원정 이후 명나라는 과도한 비용의 이유를 들어 해상을 통한 물류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 후 서양제국 중심의 세력이 해상을 통해 침략을 일삼아 중국은 오랜 기간 동안 시련과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즉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는 말을 이 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자국이 현재 동북아 물류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지금 다시 정화의 원정을 할 수는 없지만, 해상 무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러한 관심의 유무가 나라의 흥망성쇠, 즉 한국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참고문헌
· 미야자키 마사카쓰,『정화의 남해 대원정』, 일빛, 1990
· 개빈 멘지스 ,『1421-중국, 세계를 발견하다』, 사계절, 2004
· 홍문숙, 홍정숙, 『중국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 , 2011
· 함규진 , 네이버 캐스트 『중국의 대항해가- 정화 』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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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6.04.16
  • 저작시기2016.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0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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